아침 아홉시 삼십 분, 비행기가 화창한 이른 아침 하늘로 떠오릅니다. 손바닥 만한 창 밖으로 우뚝 솟은 타이베이 101 타워가 보입니다. 이제야 이 낯선 도시가 조금 편해지기 시작하던 날, 여행은 끝났습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얼떨떨했던 이별, 그래서 도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창문에 코를 붙이고 있다가 결국 창 밖으로 하얀 구름 덩이만 보이게 된 후에야 수첩을 꺼내 여행을 기록 합니다. 추억을 꺼내 여행을 마무리합니다. 겨울, 타이베이, 사람 그리고 특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행복을.
하나, 낯선 도시를 찾는 이유.
대만을 여행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중화권 특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며 음식에 대한 선입견이 있기도 했던데다, 같은 아시아권 여행에는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기도 했죠. 운 좋게 얻게 된 왕복 비행기 티켓이 아니었으면 이 도시만의 매력을 한참 후에야, 어쩌면 영영 몰랐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그만큼 타이베이는 만족스러운 여행지였습니다.
아침을 먹고 출발해 이른 저녁을 먹을 수 있을만큼 가까운 도시. 그 거리만큼 사람들의 생김새나 음식, 유행 삶의 방식 등에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 거리만큼 새롭고 놀라운 것들도 많았습니다. 오토바이와 빨간 조명 등이 만드는 이 도시만의 풍경이 완전히 새롭지 않아도 저를 사로잡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요. 그래서 타이베이에서는 유독 '낯선 도시를 찾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익숙함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끼게 해 준 타이베이 중정기념당을 두번째 찾던 날, 텅빈 공간에서 홀로 빛나는 거대한 건축물을 보며 떠난 거리만큼 익숙한 것들과 새로운 것들의 수가 교차하는 여행의 묘미를 알게 됐습니다. 이것 역시 낯선 도시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타이베이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둘, 여행의 특별함에 대하여.
타이베이라는 도시가 제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을 꼽는다면, 모든 여행이 특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줬다는 것입니다. 지나보니 저를 바꾼 시간이었던 모스크바 여행, 십수년간 꿈꿔온 프라하 여행 등 그동안의 여행은 너무나도 치열하고 무거워서 종종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타이베이에서는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을 빼고 여유있게 하루를 즐겼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일주일 내내 흐리고 비가 온 날씨가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뭔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던 여행에서 한발짝 물러나니 걸음이 가볍고 여유가 생기더군요. 골목마다 눈을 뗄 수 없을만큼 아름다웠던 프라하와 달리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평범한 융캉제의 골목길을 걷는 시간도 지나보니 똑같이 즐거웠습니다. 특별하지 않아 사진기보다 눈으로 담았고 사진 몇 장보다 그 골목에서 했던 생각들로 남았습니다. 그 소박함이 저를 여행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 것 같아 행복했던 일주일이었습니다.
셋, 이제 너무 흔한 것들의 매력.
첫번째 여행이니만큼 남들 다 가 보는 곳도 빠짐없이 찾았습니다. 그래도 겉핥기로 지나치긴 싫어서 택시 대신 버스를, 일정 없이 원하는 시간만큼 머물렀던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지만요. 어딜가나 한국 관광객이 정말 많았습니다. 다녀와서 보니 대만은 일본 못지 않게 여행 정보며 후기가 발에 채이는 곳이더군요. 제가 방문했던 곳들과 했던 이야기들은 이제 너무 흔한 것들이라 꺼내 놓을 때까지 오랜 시간을 망설였지만, 이렇게 같은 도시, 장소에서의 추억을 함께 내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만에서 가장 기대했던 지우펀에서의 하루는 폭우와 인파 때문에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 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 날을 떠올리면 아쉬움보다는 그래도 그 곳에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합니다. 너무 흔한 것이지만, 내 것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니까요. 비록 남들 다 있는 인증샷 하나 없어도, 가끔 이렇게 남들 다 하는 것도 해 봐야 한다는 것을 지우펀과 예류, 핑시선 열차 안에서 느꼈습니다.
넷, 이미 그것으로 행복한 순간.
스펀 철길에 가득한 사람들 사이로 몇 초에 하나씩 천등이 날아 오릅니다. 가능하면 그 순간 하나하나를 모두 보고 담고 싶지만 몸은 하나고 다리는 생각보다 짧으니 고민과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몇 장면만 담아도 한 시간이 훌쩍 지나더군요. 스펀에서 저는 천등을 날리지도, 기도를 하지도 않았지만 날아오르는 천등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곁눈질로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천등에 빈 틈 없이 소원을 적을만큼 필요한 것이 많았지만, 정작 그것이 날아오르는 순간엔 고민 하나 없는 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그리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행복. 그 짧은 철길에 가득한 생명력은 여행을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다섯, 그 순간 떠오른 사람.
대만 최대의 등 축제라는 말에 이끌려 고속철을 타고 타오위안에 갔습니다. 듣던대로 축제의 규모는 엄청났고 저는 저녁도 거른 채 축제장 안을 종종걸음으로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모양만 다른 연등에 금세 시들해졌고, 이만하면 남들한테 보여줄 만큼은 됐다 싶어 걸음을 돌렸습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커다란 소리. 축제의 절정인 불꽃 놀이가 그렇게 예고없이 제 앞에 펼쳐진 순간 저는 달려가며 전화기를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순간엔 사진보다 중요했던 그 통화, 먼길가지 달려간 그 축제의 장면들은 자칫 사진첩과 블로그를 위한 것들로 끝날뻔 했지만 그 통화 하나로 제것이 됐습니다. '여기 불꽃이 터져'라는 말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그 감정은 전에 없던 것이라 여전히 잔잔한 떨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혼자 여행하는 즐거움이 이런 것인가 봅니다.
여섯, 누군가를 의지한다는 것.
용산사는 작지만 무척 아름다운 사원이었습니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이며 기둥과 지붕에 새겨진 조각들은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저를 두 시간이나 머물게 한 힘은 그 아름다움이 아닌, 용산사에 모인 사람들의 뜨거운 체온과 간절한 믿음이었습니다. 일행 없이 홀로 사원을 찾은 사람들은 말 한 마디 없이 향을 피우고 무릎을 꿇어 기도를 하는데, 종교가 없는 제 눈에는 그 믿음이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구에게 저렇게 의지할 수 있다는 것,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내심 부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저는 용산사를 타이베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요.
일곱, 선물 같은 여행
'대만에서 뭐 했어?'라고 물으면 고민없이 '원 없이 먹고 왔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곳에서 저는 식도락을 즐겼습니다. 대만 하면 떠오르던 딘 타이 펑에 다녀왔고, 그들의 소울 푸드라는 우육면, 벼르던 훠궈도 먹었습니다. 다녀온 후 저는 주로 이 곳의 음식 이야기를 하며 타이베이 여행을 권했습니다. 여행 후반쯤 되어 경비를 정리하는데, 숙박비보다 많은 식비 지출 내역을 본 후 한참을 웃었습니다. 먹기 좋은 도시에서 참 바쁘게도 먹었습니다. 먹을 걱정 없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먹을 것이 넘쳐나는 여행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요. 그래서 그 날 이후 오히려 식비를 더 늘렸습니다. 혼자서 못 먹을 것이라는 점원의 말을 비웃으며 홀로 만찬을 즐겼습니다. '내게 주는 선물이야' 라면서 말이죠. 그것이 타이베이에서 별 것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여덟, 행복하기 위한 노력
여행 마지막 날 아침, 처음으로 하늘이 화창하게 갰습니다. 파란 하늘을 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날아갈 듯 기뻤고 첫 날 보지 못한 단수이의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MRT를 타고 내려 다시 버스로 40분, 그렇게 단수이 워런 마터우에서 보낸 여섯 시간동안 제가 한 것은 걷거나 잠시 멈추는 것, 또는 앉아서 노을을 기다린 것 뿐이었지만 전에 누리지 못한 평범한 하루를 보낸 것만으로 행복했습니다. 여행이 아니면 그다지 신경 쓸 일 없는 날씨와 굳이 기다려 보지 않는 노을, 그림같은 노을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니 오늘 하루 행복하기 위해 내가 했던 노력을 칭찬하게 됩니다. 이 날 워런마터우 가득 모인 사람들도 저마다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라 생각하니 여행이 무척 즐거워졌습니다. 비록 그 땐 이미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지만요. 돌아가서도 변함없이 행복해지고 싶어졌습니다.
그렇게,
이 곳이 아니었으면 이토록 행복하지 못했을 날들.
다녀온 지 일년이 지났습니다. 어느새 그 때와 같은 계절이 됐습니다. 이렇게 일주일 여행을 한바탕 늘어놓고 나니 2017년의 타이베이를 즐기러, 그 때 미처 채우지 못한 리스트를 채우려 다시 떠나야 할 것만 같습니다. 지난 겨울 타이베이 여행은 몇 안 되는 제 여행 중 가장 평범하고 소박했던, 하지만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 여행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온전히 제가 주인공이었던 그 시간들을 두고두고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크게 자랑할 것 없지만 그곳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만큼 행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언젠가 또 인생이 그렇게 너무 치열하고 버거울 때, 그 곳에 다시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 겨울 타이베이 여행 이야기, 끝
특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행복, 2016 타이베이 (Taipei)
#0 타이페이 여행의 시작- 유독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부족한 준비 때문일까?
#0.5 특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행복, 2016년 겨울의 타이페이
#1 출발, 타이베이 - 수월한 여행을 위한 준비해야 할 것들 (통신, 교통, 숙소)
#3 나홀로 타이베이 여행자를 위한 숙소 추천, 포시패커 호텔 (Poshpacker hotel)
#4 저렴한 가격 빼고는 추천하지 않는 타이베이 메이스테이 호텔 (Meistay hotel)
#7 대만 현지에서 즐기는 딘 타이 펑의 샤오롱바오 (타이베이 딘 타이 펑)
#11 공짜로 감상하는 타이베이 전망대, 샹산(象山)의 야경
#12 낯선 도시 그리고 기차 여행, 대만 핑시선 여행 - 1. 고양이 마을 허우통(侯硐)
#13 낯선 도시 그리고 기차 여행, 대만 핑시선 여행 - 2. 천등 거리 스펀(十分)
#14 낯선 도시 그리고 기차 여행, 대만 핑시선 여행 - 3. 대나무 마을 징통(菁桐)
#18 대만 예류 지질공원(野柳地質公園) - 자연의 기적 그리고 여행의 의미
#19 비에 젖은 지우펀, 동화가 씻겨 내린 자리엔 사람 구경뿐
#20 나를 감동시킨 용산사 그리고 그들의 간절한 믿음
#21 사람 냄새 진동하는 타이베이 스린 야시장(士林夜市)
#22 딘 타이 펑의 라이벌? 타이베이 메인역 덴수이러우(點水樓)
#23 낭만적인 여행의 마무리, 단수이 워런마터우 (淡水 漁人碼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