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너와 나의 소망 가득 담은 천등이 날아 오른다,

스펀(十分)에서



궂은 날씨 때문에 기대했던 풍경은 없었습니다. 새파란 하늘에 오색 천등이 그림처럼 날아 오르는 낭만적인 장면 같은 것들요. 마치 경상남도 어디쯤 온 듯 한국인이 절대다수라 여행의 감흥마저 다른 곳보다 오히려 덜했습니다. 게다가 내내 혼자였던 저는 이 곳에서 남의 행복을 실컷 구경만 하다 왔습니다. 그럼에도 대만 핑시선 기차 여행에서 천등거리 스펀(十分)을 단연 첫째로 꼽는 이유는 저마다 소망을 적고 또 담아 날리는 행위 자체의 아름다움 그리고 이미 절반쯤 이뤄진 듯 해맑은 그들의 표정들이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던 벅차오르는 감정을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행복에 대한 갈망, 이 좁은 골목에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핑시선의 중심이자 하이라이트, 스펀(十分)



핑시선의 정차역은 '루이팡 - 허우통 - 샨다오링 - 따화 - 스펀 - 왕구 - 링자오 - 핑시 - 징통' 까지 총 아홉개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중 인기 있는 역은 고양이 마을 허우통과 천등 골목 스펀, 소박한 동네 핑시, 대나무 마을 징통 정도인데 최고를 꼽으라면 역시 스펀입니다. 세계 최고의 축제 중 하나로도 꼽히는 정월대보름의 스펀 천등축제가 열리는 이 곳에서는 오늘도 수백개의 천등이 각자의 소망들을 가득 담고 날아오릅니다. 오직 이 스펀 방문만을 위해 핑시선 열차를 타는 분들도 적지 않으며 타이베이 인근 관광을 축약해 부르는 '예스진지' 중 하나이기도 하죠. 특히나 한국 관광객에게 그 인기가 대단합니다.



고양이 마을 허우통에서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열차를 탔습니다. 고양이 구경도 퍽 재미있었지만, 이러다 이미 아침일찍 모두 스펀으로 가셨는지 열차가 텅 비어 한가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잠시 후 도착한 기차역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이 텅 빈 기차의 여유와 감성을 조금 더 깊이 들여마셨을텐데 말입니다.


- 스펀역 플랫폼 풍경 -


열차문 밖으로 걸음을 떼자 조금 전까지의 여유는 온데간데 없이 출근길 지하철역 같은 풍경이 저를 맞이합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 말소리가 순간 귓전을 때립니다. 말로만 듣던 유명세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스펀역에는 천등을 체험하고 풍경을 감상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 열기가 후끈합니다.




인파에 밀려 철로를 건너고 나면 다 스러져가는 듯한 시골 기차역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 낡은 기차역에 많은 인파가 묘한 불협화음을 내는 것도 이 곳 나름의 재미입니다. 한국의 이름없는 시골 마을에서도 이렇게 낡은 풍경을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대만까지 와서 기차를 타고 이 깡촌(?)에 닿았으니 생각해보면 무척 신기한 일이고 특별한 인연입니다.



사람들이 한바탕 내린 기차역 플랫폼은 한없이 한가합니다만 다음 열차가 오면 또 한번 인파로 가득하겠죠. 그 너머로 보이는 시골 마을은 멀리서 보아도 꽤나 오래돼 보입니다. 흐린 날씨 덕에 운무가 낀 것이 제법 낭만적인 풍경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여긴 스펀입니다.


이 작은 시골 풍경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인파. 대부분이 이 곳의 풍습인 천등 날리기 체험을 위해 모였을 것입니다. 익숙한 옷차림이 많은 것을 보니 오늘도 한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TV 매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관광객의 특성상 TV에 출연한 대만 관광지와 레스토랑에는 시간대 상관없이 한국 관광객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차역부터 시작되는 좁은 골목에 가득한 사람과 우산 풍경이 말해주듯, 이제 막 점심 시간을 지난 오후에 스펀 거리는 이미 만원입니다. 그래서 핑시선의 다른 동네와 달리 스펀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는 듯 역 주변과 골목 중간중간에는 인파를 정리하는 안내요원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현재도 기차가 운행되는 철로 위에는 기차가 없는 틈을 타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저 멀리, 두둥실


좁은 골목을 힘겹게 파고들다 보니 저멀리 천등 몇 개가 하늘로 두둥실 떠오릅니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따라 올라가며 미소가 살짝 지어집니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한참 못한 흐린날의 풍경이지만 제가 이 곳에 왔다는 것이, 이 풍경에 섞여 있다는 것이 그럭저럭 감격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이후 천등의 본 무대인 골목길까지 걷는 길엔 양 옆으로 간식거리를 파는 식당과 기념품 상점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 곳에서 특히 유명하다는 볶음밥을 채운 닭다리 요리를 어깨 너머로 구경했는데, 한국인 입맛에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미 수십명이 줄을 늘어선 탓에 이렇게 눈으로나마 요기를 달래고 지나쳤습니다. 후에 듣고보니 줄을 서서 먹을 정도의 맛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스펀에서 딱히 식사를 해결한 곳이 없는 탓에 변함없는 인기를 끄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눈 팔지 않고 스펀 옛거리 한복판에 잘 왔습니다. 제가 숨을 고르며 좌,우를 살피는 동안에도 철길 위에는 쉴 틈 없이 천등이 날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천등 골목만의 분위기


여행 전 블로그 후기 등에서 수없이 보았던 익숙한 한국어 간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이 곳에 한국인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천등의 가격은 색상에 따라 다른데, 단색으로 만든 천등은 150 타이완 달러, 사방이 다른 색으로 만들어진 천등은 200 타이완 달러입니다. 한국 돈으로 약 6000원에서 8000원 정도니 큰 부담은 없습니다. 가게마다 가격에 큰 차이가 없으니 이왕이면 한국어 응대 가능(?)한 가용엄마 천등에서 구매하는 것 같습니다.




천등을 날리는 장면으로 대표되는 스펀이지만 직접 이 곳을 방문했던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골목 구석구석에 절반쯤 주저앉아 천등에 이름이며 소망들을 빼곡하게 적는 이 골목만의 풍경이었습니다. 안개비 흩뿌리는 날씨에도 붓을 든 청춘들의 갈망이 뜨거워 보입니다. 이렇게 제법 큰 천등의 네 면 가득히 원하는 것들을 적고 나면 천등 날릴 준비가 끝납니다. 어쩌면 천등이 날아가는 순간 못지 않게 이 소망들을 적으며 상상하는 행복이 크지 않을까요?



자, 이제 날립니다


그렇게 천등을 날릴 준비가 끝나면 능숙한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철길 위에 자리를 잡고 정해진 순서에 따라 천등 날리기 의식(?)이 이뤄집니다. 사실 TV에서 보았던 낭만적인 모습과 달리 실제 스펀의 천등 풍경은 전담 직원의 인도에 따라 천등을 들고 몇 번, 날리기 전 몇 번, 날리면서 또 몇 번, 날린 후 마지막으로 몇 번 이렇게 '인증샷'으로 정신없이 이어집니다. 날아가는 천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한 번 더 소망을 기도하는 여유는 이 곳에 없었습니다. 천등이 날아간 후에는 재빨리 다음 손님(?)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하니까요. 흡사 장사 잘 되는 타이베이 시내 맛집 분위기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펀의 천등 풍경이 시시하냐면 그건 아닙니다. 제 몸집만한 등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그 수가 많을수록 장관이 되고 사람들의 밝은 표정과 웃음소리 덕분에 짧은 거리를 끝에서 끝으로 반복해서 걷는 것만으로도 제법 행복한 기운이 제게도 스며듭니다. 기대했던 여유와 낭만이 없어서 실망했다가도 '이런 게 사람 사는거지'라며 금세 웃게 됩니다. 그리고 이 날 본 스펀의 천등 날리는 풍경들은 하나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서로다른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저는 천등을 날리지 않았지만, 기차 한 대를 또 보내고 이 곳에서 두 시간을 보냈습니다.





천등이 손을 떠나 날아오르는 순간, 어쩌면 진짜 장관은 하늘에 뜬 커다란 등보다 일제히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호기심, 행복 가득한 표정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하얀 흐린 하늘 위에 뜬 천등을 담는 데 집중했지만 점점 그들의 표정을 보고 담는 것이 좋아졌습니다.




날아오른 천등을 보며 좋아하는 사람들 표정에는 이미 그 소망이 절반쯤 이뤄진 듯, 아니 어쩌면 이뤄지지 않아도 이것으로 됐다는 듯한 미소가 가득했으니까요. 그 미소를 바라보는 저도 잠시 이 곳이 바다 건너 낯선 땅이라는 것을 잊고 그저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소망들이 이뤄지길 기원했습니다. 흐린 날씨가 조금 밝아진 것 같았습니다.



스펀만의 풍경, 또 하나


또 하나 재미있는 풍경이 있습니다. 천등을 날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스펀의 철길은 현재도 열차가 운행하는 길입니다. 때문에 가끔 이렇게 기차 진입 신호가 울리면 안내 요원과 천등 가게 직원의 사인에 따라 가득했던 인파가 일제히 양 옆 길로 갈라집니다. 천천히 철길을 지나가는 기차를 보며 또 한 번 사진을 찍습니다. 천등에 이은 또 하나의 '인증샷'인 셈입니다.



소망들이 환히 밝힌 대만의 옛거리 스펀


스펀에 있는 내내 예나 지금이나 오직 행복을 갈망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마음이 이 사면사색의 천등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곳 사람들 중 누구도 저 천등이 나중에 어디로 떨어져 쓰레기가 될까, 라는 현실적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만의 스펀 옛거리는 '환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가 아깝지 않습니다. 어느새 이 정취에 감화 되었는지 다음 역으로 발길을 떼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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