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시선 열차 여행의 종착역
사랑하는 이를 떠오르게 하는 대나무 마을
당일치기 핑시선 열차 여행, 처음엔 이 먼 도시에서 기차 여행을 한다는 설렘이 가장 컸습니다만, 조금씩 역마다, 동네마다 품고 있는 서로 다른 감정들과 운치, 낭만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느새 핑시선 열차의 종착역, 대나무 마을 징통(菁桐)에 닿았습니다. 대나무에 소망을 적어 마을 곳곳에 걸어두는 이 곳의 풍습이 어찌보면 스펀의 천등 날리기와 비슷해 보이지만 막상 이 거리를 걷다 보면 그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왁자지껄한 스펀 옛거리의 천등에 적는 소망들이 대부분 '나'에 대한 것들이라면 조용한 마을 한 귀퉁이에 조심스레 걸어두는 대나무에는 왠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바람들을 적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낭만 기차여행의 종착역 다운 곳이었습니다.
핑시선 기차역에서 스펀의 천등과 허우통의 고양이들이 차지하는 인기가 워낙 막강하다보니 종착역인 징통(菁桐)까지 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앞선 역들이 너무 발길을 꽉 붙잡기 때문 아닐까요? 여유있게 둘러보려 했던 저도 허우통과 스펀에서 각각 한 대씩 열차를 보내고 늦은 오후에서야 징통행 열차를 탔으니까요. 종착역으로 향하는 열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덕분에 잊었던 여유와 낭만이 조금씩 되살아납니다. 이곳이 대만이라는 설렘도 다시 떠오릅니다.
스펀에서 내리던 비가 징통에 도착하니 어느새 멎었습니다. 대만의 2월 겨울은 한국의 초봄같은 날씨였지만 앙상한 나무 끝에 매달린 빛물과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린 꽃들을 보니 잊고 있던 봄 냄새가 떠올랐습니다. 한적한 기차역 플랫폼을 걸어 나오다 발견한 계절의 흔적입니다. 이 날 징통은 제가 찾은 핑시선 열차역 중 가장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아주 작고 한적한 마을
첫번째 역 허우통 역시 사람 한 명 보기 힘들 정도로 한적 했지만 종착역 징통은 인파는 물론 상점의 수도 허우통보다 적은 그야말로 시골 마을입니다. 이 날 저와 함께 기차에서 내린 이가 몇 되지 않았고 마을로 들어서는 골목 역시 한적했습니다. 기차역이 다른 역보다 크고 선로의 수도 많은데, 때문에 동네 못지 않게 이 철로 위의 낭만을 즐기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아마 날씨가 좋았다면 이 곳 역시 다른 역처럼 사람으로 붐볐을지 모르나, 이 날은 이대로 사람없이 한적한 풍경을 즐길 수 있어 제게는 더 좋았습니다. 사실 스펀의 인파에 한 시간 넘게 치여 여유가 간절하던 시간이었거든요.
영화로 유명한 징통역 기찻길
핑시선 열차가 마지막으로 멈춰 서는 이 철길은 그 자체로도 매우 운치있고 아름답습니다만, 이 곳을 찾는 많은 분들에게 '영화 속 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라는 영화의 배경 중 한 곳이 바로 이 징통역의 철길이죠. SNS의 여행 후기에서 이 철길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같이 가느다란 철길에 몸을 의지해 팔을 양 옆으로 벌리고 있죠. 영화 속 바로 그 장면처럼. 아쉽게도 저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아서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꼭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징통역의 철길은 우리가 가슴속에 품은 혹은 막연하게 그리고 있는 '철길의 감성'을 현실에서 감상할 수 있는 곳입니다.
- 대만 영화 '그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那些年,我們一起追的女孩, You Are the Apple of My Eye) -
이제 추억으로만 남은 탄광촌
현재는 대나무를 테마로 한 관광지가 됐지만, 본래 징통은 대규모 탄광이 운영되던 탄광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은 마을 곳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걷다보니 강원도 탄광촌을 홀로 여행하던 언젠가가 떠오를 정도로 친근합니다. 표지판에 적힌 글자와 사람들이 낯설긴 하지만 대만은 이렇게 곳곳에 친근한 곳들이 많습니다.
- 광부들을 기리는 마을의 표식 -
현재는 대나무를 테마로 한 관광지로 변신한 만큼, 역 앞의 짧은 번화가에는 기념품과 음식을 파는 평범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스펀이나 허우통보다 그 수와 규모가 무척 작은 편이라 제법 여행할 맛이 났습니다. 그래서 종일 비어있던 속을 길거리 간식으로 채우고 제일 커 보이는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결국 들고온 것은 동전 지갑으로나 쓸 수 있는 작은 천 파우치 두개였지만,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즐거운 쇼핑이었습니다. 한가롭게 기념품을 하나하나 구경할만한 여유는 이 마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마을 가득 걸린 대나무 그리고 소망들
마을의 여유에서 조금, 한 발짝 떨어져 다시 이 징통을 바라보면 크지 않은 마을 곳곳에 두어뼘 길이의 대나무가 가득 걸린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무며 난간, 문고리까지 무언가 걸 수 있는 공간에는 여지없이 무언가가 빼곡히 적힌 대나무 한 마디가 있습니다. 적힌 글자들을 보니 전세계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서로 다른 높낮이로 걸린 대나무는 그 시간만큼 낡고 색이 바래 이 마을 풍경의 하나가 됩니다. 이제 막 건 듯한 매끈하고 환한 대나무는 그것대로 한 눈에 띄어 그 간절함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하늘에 날리고 나면 그 소망이 그저 가슴에 남는 천등과 달리, 징통 마을 곳곳에 걸린 대나무는 왠지 다시 이곳을 찾을 때까지 그대로 이 곳을 지킬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가도 이 곳에 변함없이 걸린 소망을 기억하며 그것이 꼭 이뤄질 것이라 한 번 더 믿고 또 다짐하게 될 것입니다. 마을 곳곳은 대나무가 가득해 더 자리가 없어 보이지만, 다가가 자세히 보면 이대로 수십 혹은 수백년쯤 더 소원 주문을 받아줄 만큼의 여유가 보이기도 합니다. 검게 색이 변한 안쪽 대나무가 그렇다고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대나무 하나의 가격은 40 타이완 달러, 한국돈으로 2000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날 큰 맘먹고 대나무에 소원을 두어개 적었습니다. 어쩌면 소원이 정말 이뤄지길 바란 것보다 다음 여행 때 꼭 다시 이곳에 와서 이 날 여행의 감정과 기록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때쯤이면 아마 대나무가 쌔까맣게 변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징통에서는 다음 열차를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작은 마을을 걷고, 대나무에 적힌 알 수 없는 글자와 획 속에 담긴 그들의 마음을 읽다가 저도 하나 그 사이에 제 것을 끼워 넣기에 한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열차는 저보다 먼저 플랫폼에 서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더군요. 더 갈 역이 없다는 것이 그 순간 무척 아쉬웠던 것을 보니 어느새 이 동화 혹은 영화 같은 기차 여행에 푹 빠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짧은 기차 여행의 마지막 인사
출발을 앞둔 열차에 앉아 가만히 밖을 바라보며 짧은 기차 여행에 마지막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 특별할 것 없는 반나절짜리 기차 여행이었지만 제게는 다음 대만 여행을 기약하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됐습니다. 그 때도 저는 이 열차가 그리고 동네들이 그리 특별하지 않다고 하겠지만 말이죠. 핑시선 기차 여행, 낯선 도시에서 얻은 또 하나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렇게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이제 다시 타이베이로 돌아갑니다.
특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행복, 2016 타이베이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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