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가능하다면 그 도시의 시장, 그 중에서도 야시장은 꼭 방문해 보는 편입니다. 물론 저같은 관광객이 다수를 차지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도시 사람들의 삶을 가장 여과없이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의 크리스마스 마켓, 멜버른의 빅토리아 마켓,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 등이 그렇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블로그나 책, 단체 관광에서 볼 수 있는 '매끈한' 여행과는 다른 모습을 좋아합니다.




그런 면에서 타이베이의 스린 야시장은 이제 빛을 많이 잃은 곳입니다. 과거에는 이곳이 오롯이 타이베이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을지 몰라도, 현재는 현지인들보다 저같은 여행자, 관광객들이 더 많을 정도로 닳고 닳은 관광지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때문에 용산사에서 나오며 가급적 다른 야시장을 찾고 싶었고, 마침 근처에 화시지에 야시장이 있었지만 그래도 첫번째 여행에선 '남들 다 가보는 곳'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지하철 MRT를 탔습니다. MRT 스린역과 젠탄역 사이에 있어 어느쪽에 내리셔도 큰 차이는 없지만 그래도 스린역에서 내리는 것이 마음이 편하겠죠?


스린 야시장(士林夜市)은 타이베이 시내 야시장 중 규모가 가장 큰 편에 속합니다. 영업시간은 가게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략 오후 여섯시부터 시작해 세시쯤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여행자의 밤'을 위한 곳입니다.



친숙하고 또 낯선 야시장 풍경


스린역 입구를 나서면 저멀리 까만 밤을 환히 밝히는 풍경이 있어 묻거나 찾지 않아도 찾아가기 쉽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야시장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한바탕 펼쳐진 풍경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데, 지나보니 이 길은 시장까지 이어지는 도로더군요. 대로변을 노점들이 빽빽하게 메우고 있어 이미 시장 안에 들어선 줄 알았습니다. 낮에는 없다 밤에만 생기는 일종의 '도깨비 시장'인 셈입니다.



이후 펼쳐지는 시장 풍경들은 정겹기도, 매우 낯설기도 합니다. 깨끗함과는 거리가 있는, 좋게 말해 친숙한 야시장 풍경이 국내 여행을 하며 간간히 보던 그것과 크게 차이가 없으면서도 글씨들과 음식들의 모양새, 그리고 거리에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이질감과 함께 묘한 흥분을 선사합니다. 중화권 음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저는 대만에서 주로 일본식 퓨전 음식을 먹었는데, 야시장의 음식들은 그보다는 중화권 고유의 향과 맛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보다 맛깔스러웠던 것은 사람 냄새 폴폴 풍기는 이 시장의 풍경들이었습니다.

이 맛에 야시장 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제 야시장이 발단을 지나 전개 혹은 절정으로 향하는 여덟 아홉시 언저리, 시장에는 벌써 끝나버린 하루를 아쉬워하는 이들과 뒤늦은 저녁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가득합니다. 이런 풍경을 좋아하는 제게는 상하좌우 눈길 돌리느라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이미 그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음식점 앞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좁은 길은 시장을 즐기러 온 사람 사이를 파고들어 지나야 할 정도로 붐볐습니다. 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붉은 색으로 가득했던 시장 밤풍경은 어딘가 아찔해질정도로 몽환적이기도 했습니다. 빛이 바래고 있다해도, 역시나 이 야시장은 이 도시의 가장 원초적인 매력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유명 관광지보다 이 곳을 탐험하는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야시장의 꽃은 역시 '먹거리'


기념품이나 선물거리를 파는 가게가 몇 있지만, 스린 야시장의 주인공으로 '먹거리'를 꼽는 데 이견을 내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스린 야시장 최고의 즐거움으로 먹거리를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이곳에는 개성있고 저렴한 음식들이 넘쳐났습니다. 사실 저는 그 먹거리들보다는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과 환호 소리들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와서 맨 입, 빈 속으로 돌아간다면 아마 누군가는 분명 저를 혼내겠죠. 마침 저녁도 거르고 예류 - 시먼 - 용산사를 활보한 덕에 허기가 대단하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맛 본 스린 야시장의 먹거리는 이렇습니다.



고기 성애자를 위한 '큐브 스테이크'


시장 입구에서 이 풍경들을 낯설어하던 제가 '어 저거..!' 하면서 반갑게 달려간 것은 여행 전부터 익히 들은 바 있는 큐브 스테이크입니다. 두툼한 소고기를 즉석에서 구워 먹기좋게 한 입 크기로 잘라 내는데, 그 모양이 만듯한 주사위 모양이라 큐브 스테이크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즉석에서 구워내는 모습이 고기 맛보다 더 맛깔스러운 시장 음식으로 가격은 100 타이완 달러, 5천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고기 성애자가 이 앞을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큐브 스테이크 1인분은 대략 이 정도입니다. 꽤 크고 두툼한 고기를 굽길래 가격을 두세 번 보며 의심했는데 역시나 그 한 덩이가 온전히 제것이 아니더군요. 물론 가격대비로는 훌륭하지만 굽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비해 맛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고기가 질기기도 했고, 소스도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 추천할만한 음식이 되지는 못합니다. 굽는 모습만 보면 충분히 재미있고요.



얼굴보다 큰 닭튀김 '지파이'


스린 야시장 입구에 위치한 이 가게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스린 야시장'이라는 이름보다 오히려 더 유명한 지파이를 파는 곳입니다. 향신료 냄새가 순간 코를 찌를만큼 강하게 양념한 닭튀김을 70 타이완 달러, 약 3000원에 먹을 수 있는데, 무엇보다 그 크기 때문에 인기가 높습니다. 거짓말 좀 보태 제 얼굴보다 클 정도라고 할까요? 오죽하면 제가 절반쯤 먹고 포기할 정도로 양이 푸짐합니다. 어떻게 닭고기 한 덩이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커다란 순살치킨입니다. 양념이 강하긴 하지만 향신료의 거부감은 없는 편이라 치킨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것 하나에 맥주 한 캔이면 든든하게 저녁을 해결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지파이로 배를 채우면 다른 야시장 음식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하셔야겠죠.


오리지널 '대만 카스테라'


우연히 본 이 커다란 빵의 가격은 80 타이완 달러, 한화로 약 3000원입니다. 근데 그 크기가 무척 커서 시각적인 감흥이 지파이보다 오히려 더 컸습니다. 그 맛이 궁금해 구입하면서도 '저걸 다 먹으려면 며칠이 걸릴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때까지 저는 대만에 '대왕 카스테라'가 유명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오리지널 카스테라보다 20 타이완 달러 더 비싼 치즈 카스테라가 이 날 제 스린 야시장 유일의 전리품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후 삼일간 밤마다 이 카스테라는 깊은 밤의 허기를 달래준 훌륭한 간식이 됐습니다. 밀크티와 궁합이 아주 좋더군요. 요즘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현지 가격으로는 매력적인 간식이지만 현재 한국에서 파는 가격으로는 '글쎄?'라는 의문이 드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소란스럽고 낭만스러웠던 야시장의 밤


스린 야시장을 대만 여행을 앞둔 분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야시장 그 본래의 목적보다 밤이 아쉬운 해외 여행객의 주머니를 위한 '관광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게는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이 만드는 시장 특유의 조화 혹은 부조화 역시 충분히 매력적이었지만 현지 느낌 물씬 풍기는 야시장을 찾고 싶다면 타이베이 시내의 다른 중,소규모 야시장을 찾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 곳에도 유명한 먹거리나 간식들은 빠짐없이 갖춰놓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스린 야시장을 한 번쯤 찾아볼만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이 곳은 타이베이의 가장 큰 야시장으로 변함없는 생명력을 품고 있고, 모여든 사람들의 수만큼 그 '사람 냄새' 역시 짙게 풍기기 때문입니다. 유난히 아쉬운 여행 후반의 밤에 그 풍경이, 냄새가 아주 잘 어울린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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