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 타이베이 그리고 인근 여행을 하며 웬만큼 알려진 유명 관광지들을 모두 가보았지만 가장 강한 인상을 줬던 곳을 꼽자면 단연 용산사(龍山寺)를 꼽습니다. 숙소를 옮기느라 오전을 보낸 토요일, 점심을 먹고 나니 벌써 오후가 절반쯤 지나 무엇을 하기에도 여의치 않은 반쪽짜리 하루였습니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갈만한 곳을 찾던 중 많은 추천을 받았음에도 여태 잊고 있었던 용산사를 떠올렸고, 제가 있던 타이베이 메인역에서 시먼을 지나 갈 수 있다는 것을 지도에서 확인한 후 소화도 시킬 겸, 이 도시에 익숙해진 제 여행도 만끽할 겸 용산사까지 걸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 속 지도에서는 손가락 한 마디쯤의 거리였지만 걸어가는 동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습니다. 괜히 신을 냈습니다.
1738년에 세워진 용산사는 타이베이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입니다. 중간에 소실돼 1957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고 하네요. 도교, 불교, 토속신 등 여러 종교의 영향을 고루 받은 이 사원은 대만인들 특유의 솜씨가 발휘된 건축물로도 유명합니다. 그리 크지 않은 절이지만 기와와 지붕 하나하나에 극도로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과 조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MRT 용산사역 1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약 1분 정도면 도착합니다.
도심 한복판에 홀로 빛나는
섬세하고 화려한 사원
용산사는 그 이름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은 데다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산 속에 자리 잡고 있지도, 숲에 둘러싸여 있지도 않아 그 위용에선 그리 강한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MRT 역 출구를 나와 짧게 조성된 공원을 건너는 동안 마치 종묘 공원을 연상 시키는 노인들의 바둑 그리고 노숙 풍경이 펼쳐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치안이 무척 좋은 타이베이에서 용산사 앞은 처음으로 불안감을 느낀 곳이었습니다. 앞으로 차가 지나는 고신사의 분위기 역시 제가 생각한 것과 달랐습니다.
원숭이의 해 그리고 정월 대보름을 맞아 용산사 앞에는 한 해 행복을 기원하는 연등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소원을 빌거나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가 기대하고 또 상상했던 용산사의 모습가는 점점 더 그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사가 꼭 세상과 떨어져 고고한 자세를 취할 필요는 없지만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라는 얘기에 기대가 컸거든요.
하지만 그 안에 들어서니 마치 다른 세상이 펼쳐진 듯 화려한 용산사의 모습에 넋을 잃었습니다. 크지 않은 내부였지만 마치 광장을 둘러싼 것처럼 네 방향에 세워진 신사의 건물들이 커다란 절을 응축시켜 놓은 듯한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뽐냈습니다. 기와 하나하나에 새겨진 조각들이며 그 위에 놓여진 용과 봉황의 형태가 무척 섬세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주변엔 다분히 현대적인 타이베이 시내의 건물들이 있었지만 그 형태가 한참동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인상이었습니다.
유난히 붉은 조명들 때문에 더 환상적으로 보였을 지도 모르지만, 용산사의 건축은 세공에 능한 대만인들의 솜씨에 감탄하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 작은 절에 이토록 큰 감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그 좁은 공간을 잘게 나눠 그 사이사이를 메꾼 그들의 솜씨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십분만에 둘러볼 수 있는 이 작은 절에서 두 시간 넘게 머물렀던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들의 정신을 담은 화려한 사원에 붉은 조명과 제물 그리고 자욱한 향 연기가 더해지니 이 안이 타이베이 속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습니다. 두 시간 가량 저는 이 좁은 절 안을 몇 바퀴 돌며 지붕과 기둥 그리고 조각들에 새겨진 시간과 힘을 감상했습니다.
변함없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종교 사원
마침 그 날이 주말이라 더 많았겠지만, 작은 사원 곳곳을 가득 채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관광객도 다수 있었지만 그보다는 기도를 위해 찾은 대만인들의 모습이 더 많이 보였습니다. 용산사는 타이베이 시내 유명 관광지지만 현재도 이들의 종교 사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누구나 향 세개를 받게 되는데, 사원 내 놓인 향로에 꽂고 기도를 하기 위함입니다. 저도 향 세개를 받았고, 서툴지만 그들의 기도를 따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용산사 내에는 매우 경건한 기운이 맴돕니다. 사람들은 말 없이 머리를 숙여 기도를 하고, 향과 초에 불을 붙입니다. 신의 형상을 딴 상을 바라보는 표정은 하나같이 무척 간절해 보입니다. 때문에 사진을 찍으면서도 무척 조심스러워지더군요. 이 곳에서 소란스러운 웃음 소리를 내거나 떠드는 것은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었는데, 그 중에는 익숙한 언어도 자주 들렸습니다. 아쉬운 일입니다.
나를 감동시킨 그들의 간절한 기도
한동안 넋을 잃게 한 용산사의 화려한 건축 다음에 눈에 띈 것은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의 경건한 기도, 표정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간절함 등이었습니다. 잠시 눈에 보였다 사라지는, 혹은 애초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지만 두 시간 가량 머무르며 이 수백년 된 건축물 못지 않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대만 사람들은 이 곳에서 대부분 말 없이 그저 향을 꽂고, 머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기도였지만 하나같이 오랜 시간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그 간절함이 제게도 전해지더군요. 모은 손, 다문 입, 젖은 듯한 눈으로 보인 그들의 경건하고 간절한 기도는 용산사에서 본 가장 귀한 장면들이었습니다.
쉬운 여행에서 얻은 무거운 감동
타이베이에서 저는 늘 가볍게 여행했습니다. 남들이 짜 놓은 일정에 맞춰 움직일 필요도 없었고 특별히 가보고 싶던 몇 곳을 제외하면 그 날 아침 마음먹은 곳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마음에 들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같은 곳에서 식사를 했고 궂은 날씨에 사진 욕심같은 것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이 곳에 일주일간 머무는 것 외엔 아무 부담 없었던 가벼운 여행, 하지만 그 날 저녁 용산사에서 받은 감동 만큼은 제법 그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사원 안에서는 시간의 힘을 느꼈고, 사람들의 경건한 표정에서 편한 여행에 젖어있던 나를 돌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두 시간 내내 제게 있었습니다.
대자연 못지 않게 사람 역시 감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용산사는 타이베이에서도 꼭 한번 더 가고 싶은 곳입니다. 그 땐 좀 더 멋지게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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