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은 기대였고
그 이후는 오기였어요
아마도 예류 지질공원에 다녀온 날이었던가요, 혼자 여행을 가면 점심을 굶을 때가 많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돌아 다니고, 돌아 보고 싶은 마음이 큰데다 그렇다고 대강 때우기는 또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차라리 저녁 식사로 끝내주는 걸 먹자.'라며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기대했던 예류 지질 공원은 듣던대로 '신기'했습니다만, 역시 저는 자연의 신비나 절경에는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만 한 번 더 확인한 날이었습니다. 설상가상 종일 몰아치는 비바람에 큰 맘 먹고 산 비닐 우의는 힘없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다시 돌아온 타이베이, 버스 안에서 내내 '끝내주는 것'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추천한 키키 레스토랑이 버스 정류장과 머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목적지인 중샤오푸싱역을 두어 정거장 남기고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1991년에 개업한 키키 레스토랑은 타이베이에서 무척 인기있는 음식점 중 하나입니다. 몇해 전 한국 방송에도 출연해 안 그래도 현지인들로 북적대는 식당이 더 가기 어려운 곳이 됐다고 합니다. 메뉴는 중식이 기본인데 중국보다 비교적 담백한 것을 좋아하는 대만 사람들 입맛에 맞춘 깔끔한 퓨전 중식이 인기가 높습니다.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무척 좋습니다. 타이베이 시내에 세 곳의 점포가 있습니다. 제가 간 곳은 중샤오푸싱 점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곳이 가장 입장하기 치열한 곳이더군요.
그래서, 자그마치 한 시간 반을 기다렸습니다.
예약을 하지 못했지만 혼자이니, 그저 수십분 기다리면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마침 식당 앞에 대기자를 위한 의자도 놓여 있더군요. 삼십분쯤 걸릴 거라는 점원의 말을 믿고 의자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또 나갔습니다. 저녁 가족 식사 모임, 직장인들의 회식 그리고 SNS를 통해 즉석 만남을 가지는 한국인 여행객들의 약속 장소로도 이곳이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계속 교차하는 동안 시간은 약속된 사십분을 지났습니다. 그 때부터 대기줄을 관리하는 점원이 연신 Sorry 라고 사과를 하더군요. 그 말을 스무번쯤 더 듣고 나서야 식당 안으로 초대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아홉시가 가까웠고 저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내부는 타이베이에서 방문한 일반적인 중식집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 물론 딘 타이 펑 같은 유명 음식점을 기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우육면집 홍사부면식잔같은 대중음식점에 비해서는 훨씬 깔끔하고 넓습니다. 혼자 온 저는 당연히 가장 작은 테이블을 안내 받았습니다. 이....런 테이블에 앉기까지 한 시간 반이 걸린 것이군요.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긴 하지만 키키 레스토랑은 현지인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입니다. 때문에 유명 식당처럼 한국어 메뉴판이나 한국어에 능통한 점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이 곳의 인기 메뉴인 돼지고기 파 볶음과 연두부 튀김은 사진으로 프린트가 되어 있어 손가락과 고개 끄덕끄덕으로 주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비어'나 '퐌(밥)'을 추가하면 되겠죠? 물론 저는 둘 다.
사진 속 빛깔이 군침을 자아내게 했던 돼지고기 파볶음은 한 숟갈 가득 퍼먹어 보니 한국인이 딱 좋아할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념한 돼지고기를 파와 고추 등과 함께 볶아냈는데 쫄깃한 고기와 아삭한 파 식감이 무척 조화로운 데다 고추향이 알싸하게 퍼지는 것이 한국인이 사랑하는 매운맛입니다. 이대로 밥에 올려 먹으면 두어 그릇은 금방 뚝딱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파의 식감. 향도 향이지만 아삭 아삭하며 씹히는 식감이 이 자체로 입맛을 돋우더군요.
먼저 다녀가신 많은 분들이 극찬한 연두부 튀김은 흡사 달걀찜을 먹는 것 같다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겉면을 갈색으로 튀겨 자칫 한국 밥상에서 먹던 두부 부침이 떠오르는데, 부침 대하듯 젓가락을 우악스럽게 휘둘렀다가는 연두부가 다 흩어질 지도 모르겠습니다.
입으로 무는 줄도 모를 정도로 부드러운 속살은 두부 특유의 비릿한 향도 없어 평소 두부 요리를 싫어하는 분들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양념이 거의 없어 맛이 무척 담백 혹은 심심한데, 그래서 돼지고기 파 볶음과 같이 주문하나 봅니다.
혹시 일행이 오시나요?
네, 종일 굶은 저는 밥 두그릇을 시켰습니다. 혹시 흐름이 끊길까봐 미리 주문해 나란히 두 그릇을 놓고 먹었습니다. 제가 요리 두 개와 밥 두 그릇을 주문하니 친절한 점원은 제 건너편에 일행을 위한 테이블 세팅을 해 주시더군요. 이걸 고마워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끊임없이 돼지고기 파 볶음을 밥 위에 올려 먹었습니다. 먹다보니 생각보다 양이 꽤 많습니다. 아니, 제 양보다 많다는 것이 아니라 파 볶음 양이 많아서 밥이 모자랄 것 같다는 뜻입니다.
파 볶음의 알싸한 맛과 향이 끊임없이 입맛을 자극합니다. 먹을수록 왠지 허기가 지는 것 같은 느낌에 밥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한 저는 호기롭게 대만 맥주를 주문했습니다.
대만 사람들도 대만 맥주를 잘 마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건 홍콩 사람들도 마찬가지인데, 로컬 맥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칭다오 맥주를 마신다고 하네요. 하지만 처음 경험한 대만 맥주는 뭐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병맥주 정도였달까요?
아, 맛이 없는 게 맞군요.
이렇게 푸짐한 한 상에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니 예류 지질 공원에서의 비바람도, 버스에서의 지루한 시간도, 한 시간 반의 대기 시간도 어느 정도 보상받는 것 같습니다. 키키 레스토랑은 사람이 너무너무 많은 것이 문제지 맛과 분위기에서는 딱히 흠 잡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 끼 제대로 먹은 가격은 요리 두개가 470 타이완 달러, 밥과 맥주가 160 타이완 달러, 도합 630엔 타이완 달러입니다. 여기에 세금이 추가로 붙으니 3만원에 가까운 금액입니다. 혼자서 먹은 한 끼 저녁식사 치고는 만만치 않은 가격입니다. 물론 이 양은 제가 혼자 다 먹었다는 것이지 1인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곳을 찾으시는 보통의 여행객이라면 두명이서 부족함 없이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몰려드는 인파가 문제는 문제인지라 키키 레스토랑 방문 계획이 있으시다면 꼭 미리 예약을 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예약 문제만 해결되면 이 곳은 정말 괜찮은 레스토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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