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여행의 마지막 스케쥴 이즈마일롭스키 전통 시장
정들 때쯤 떠나야 할 때가 온다던가요, 열이틀의 여행도 이제 마지막 하루가 남았습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모스크바에서 열흘 넘게 뭐하지, 너무 길게 잡았나'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와보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갔고, 아쉽습니다. 마치 이제 막 시차 적응 끝나니 다시 돌아가야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마지막 하루를 남기고 무엇을 할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이 남아 있었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내사랑 성 바실리 성당도 꼭 한 번 더 보고 싶었고, 아직 못한 쇼핑 생각도 났고요.
하지만 여행 마지막 날인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서울에서 기다릴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선물 하나 변변하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남았던 터라 이번 여행 마지막 스케쥴로 전통 시장 이즈마일롭스키를 선택했습니다. 모스크바 최대의 전통 시장 중 하나로 마뜨료시카 등 전통 공예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어 관광객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죠. 게다가 전통시장답게 먹거리도 많다고 하니 선물도 사고 러시아 전통 시장 분위기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길을 나섭니다.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풍물 시장 중 하나로 예전엔 주말 벼룩시장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관광객을 위해 평일에도 기념품을 파는 전문 상인들이 많다고 합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기념품인 전통 인형 마뜨료시카부터 러시아를 상징하는 털모자, 귀금속, 액세서리까지 다양하게 판매한다고 하네요. 시장 곁에는 나무로 지어진 이즈마일로브 끄레믈(성)이 전통 시장과 함께 유명하다고 합니다. 오기 전에는 그저 기념품 쇼핑을 위해서 선택한 곳인데 알고 보니 생각보다 역사도 깊고 한번쯤 와볼 만한 '핫 플레이스'였군요?!
이즈마일롭스키 전통 시장은 모스크바 북쪽 외곽에 위치해있으며, 인접 전철역으로는 남색 노선의 '파르티잔스카야 (Партизанская)가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으면 시장에 도착할 수 있으며, 시장 입구에 사진과 같이 커다란 안내판이 있어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비교적 외곽에 위치해 다녀오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므로 짧은 여행 일정에는 추천하지 않는 곳입니다. -차라리 조금 비싸더라도 아르바트에서 기념품을 사는 편이 낫습니다- 저도 가서 얼마 안있었는데 다녀오니 너댓시간이 훌쩍 가버렸더라구요, 여행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시간이 더 빠르게 느껴졌습니다.
동화 속 마을같은 이즈말롭스키 시장 입구
입구 간판을 지나 5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이렇게 시장 입구가 나옵니다. 알록달록 색색의 성 같은 건물들이 너머로 보여 마치 장난감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같군요. 원래는 시장을 들어가는 데에도 약 10루블(약 200원)의 입장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평일에 이른 시각이라 그런지 입구 관리인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입장하게 됐죠, 속으로는 작게 '럭키'를 외쳤지만, 이것이 결코 럭키가 아니었음을 곧 알게 되었죠.
러시아 전통 시장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른 시각이지만 제법 많은 상점이 부지런히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러시아 전통 목각인형 마뜨료시카였고, 사진에서처럼 이색적인 물품도 보였습니다. 클림트의 그림이 새겨진 커다란 카펫과 풍경, 정물화로 장식한 담요 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런 회화가 새겨진 상품들 역시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념품 중 하나였습니다. 담요나 쿠션, 에코백까지 종류도 다양했죠. 저야 이 것들에서 러시아 고유의 냄새를 맡을 수 없어 별 관심 없이 지나갔지만요. -아마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닐까요?-
역시나 이 곳의 대표 상품은 뭐니뭐니 해도 이 마뜨료시카입니다. 러시아 여행 기념품으로는 역시나 이것만한 게 없죠. 남녀노소 다 좋아하고, 종류와 가격도 다양해서 선물용으로 고르기에도 좋으니까요. 몇몇 문을 연 상점을 보니 아리따운 여성 그림의 전통 마뜨료시카 외에도 남성,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색다른 마뜨료시카도 있었습니다. 충격적이었던 건 푸틴과 스탈린이 그려진 마뜨료시카도 있었다는 건데요, 현재 러시아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는 두 인물이라 그런 것 같지만, 저런 인형을 선물하거나 제 책상에 놓고 싶지는 않군요. -푸틴 여니 푸틴, 또 푸틴, 다시 푸틴, 자꾸 푸틴이라니..-
마뜨료시카와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물품인 모피 제품도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의 주력 메뉴(?)입니다. 너구리를 통째로 벗긴(;;) 모피와 밍크, 너구리 털로 만든 모자 등이 여러 가게 앞에 걸려 있었습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생생한 저 모피를 목에 두르고 싶진 않군요- 여행 전부터 러시아에 오면 꼭 저 털모자를 구입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여행 후반에 날씨도 늦겨울처럼 풀린데다 이 곳에서도 저 털모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쓰는 '노땅 아이템'에, 모피 제품이라 한국에 가져갈 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에 그냥 구경하고 만져보고, 두어 번 써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저 너구리들이 팔딱거릴 것 같습니다-
마뜨료시카의 가격은 아르바트의 기념품 가게보다 크게는 절반 가까이 저렴했습니다. 총 5개의 인형으로 구성된, 비교적 비싼 인형이 500 루블, 한화로 약 만 원 정도니 선물용으로 괜찮아 보입니다. 다만 요즘 이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에도 '중국산 저가 인형'바람이 불어서 중국산 마뜨료시카가 많다고 하는데요, 가격은 저렴하지만 그림 상태나 제품 마감이 좋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면 러시아에서 사는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놈의 돈이 뭔지, 참 많은 것들이 망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러시아 전통 시장에서도 러시아 물품을 잘 확인하고 사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합니다. 이 곳에서 마뜨료시카를 구매하실 때는 잘 확인하셔야겠습니다. -이런 비극이-
제가 방문한 날은 시장 입구에 들어선 상점 중 문을 연 곳이 절반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제 막 영업이 시작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째 시간 선택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어느 곳이건 전통 시장은 저녁에 진짜 분위기가 나기 마련인데, 여행 마지막 날이라 마음만 급해 생각을 못했네요. 얼마 열지 않은 상점들도 저한테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이제 막 출근해서 상품을 진열중이었고, 간간히 단체로 온 관광객과 가격 흥정을 하는 모습 정도가 보였습니다.
누가 모스크바 아니랄까봐 한 쪽에서는 이렇게 그림을 파는 곳도 있었습니다. 정말 이 그림 파는 풍경은 모스크바 거리 풍경을 상징한다고 해도 될 정도로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 많은 그림들은 대체 누가 다 그리는 걸까요?
확실히, 시간을 잘못 골랐습니다.
역시나 너무 일찍 온 것일까요? 아니면 오기 전 검색 결과 속의 어느 블로거의 말처럼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은 주말에 가야 하는 곳이었을까요? 그나마 몇몇 상점이 관광객을 반겨주던 시장 입구쪽과 달리 안쪽은 그야말로 '텅텅' 비었습니다. 이게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건지, 시장이 폐쇄가 된 건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황망한 풍경에 당황하면서 사람의 흔적을 찾아보지만, 어째 사람이 떠난 지 꽤 오래 지나 보입니다. 이 시장은, 망해가는 중일까요?
이렇게 된 거
이 쯤 되니 오히려 정신이 들면서 생각이 또렷해집니다. 여행 마지막 날, 선물 쇼핑 스케쥴은 시원하게 망했고 이렇게 된 거 이 큰 도시에서 어쩌면 가장 황망하고 쓸쓸한 정오의 이즈마일롭스키 시장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보자는 생각에 빈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보았습니다. 순식간에 '모스크바 출사'가 되어버린 여행 마지막 스케쥴, 그 동안 사진 참 많이 찍었지만, 이렇게 된 것도 가히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생각보다 독특한 풍경들이 꽤 많았거든요. 이 대도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쓸
쓸쓸
쓸쓸쓸
낯선 외모의 이방인이 사람도 없는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꼴이 수상했던지 청소하시는 분들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시고, 우연히 만난 모스크바 청년 3인과 짧은 영어와 악수로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현지인과의 소통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막 이렇게 이 곳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군요. 그래서 그런지 이 곳의 쓸쓸한 풍경들이 더욱 눈에 들어옵니다.
시장 뒷골목에선 이 전통 시장의 연륜을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덧칠에 덧칠을 했을 노란 건물들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낡았지만, 그 자체로도 꽤나 멋진 모습입니다. -제가 이런 풍경을 좋아해서인지도 모르겠지만요- 그래도 주말이면 이 골목들도 상인들과 사람들로 북적북적 활력이 가득하겠죠? 이렇게 빈 곳만 걷다보니 이 시장의 가장 시끄러운 풍경이 몹시 보고 싶어집니다.
이즈마일롭스키 시장 속 작은 성
이즈마일로보 끄레믈 (Kreml'v Izmaylovo)
이즈마일롭스키 시장과 이어지는 이 알록달록 아름다운 건물은 작은 성으로 불리는 이즈마일로보 크레믈입니다. 이 곳 역시 시장과 함께 유명 관광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모양의 아름다운 전통 양식 건물들이 모여 있고, 전시관 혹은 상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 외관 때문에 러시아인들도 매우 좋아하며, 이 곳을 배경으로 신혼 부부의 웨딩 촬영이 이뤄지기도 한다네요. 마침 제가 간 날도 한 쌍의 부부가 웨딩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목재 건물 특유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이즈마일로보 크레믈의 건물들은 모스크바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습니다. 외관이 무척 깨끗하고 깔끔한데요, 2005년 큰 화재가 나 다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물론 지금 건물도 충분히 아름답지만, 정말 소중한 원래의 유산이 불에 소실됐다니 안타깝습니다. 이즈마일로보 크레믈 내부의 건물들은 서로 자기가 가장 예쁘다고 경쟁이라도 하듯 개성 넘치는 모양과 아름다운 색상으로 가득합니다. 짧은 시간동안의 방문이었던 탓에 건물의 용도와 내부 모습 등은 알려드릴 수 없지만 작은 성 안을 둘러보며 보았던 풍경들을 사진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
어떠세요, 그 동안 포스팅을 통해 보셨던 모스크바의 건물들과는 다른 화려함과 동화 속 건물 같은 순수함이 있지 않나요? :)
이런 이색적인 느낌 때문에 웨딩 촬영 장소로 인기를 끌고 있나 봅니다.
웨딩 촬영으로 인기를 끄는 장소인만큼 실내 장식물엔 이렇게 우리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모스크바 곳곳에서 이런 풍경을 여럿 본 기억이 나네요. 역시 사람 마음은 다 같은가 봅니다. 무뚝뚝한 표정이지만 그 속에는 사랑과 소망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있는 거겠죠 :)
여행의 마지막, 다분히 미친 여행다운 마무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행 마지막 날 선택한 이즈마일롭스키 시장 구경은 실패입니다. 너무 이른 시간에 간 시장에는 몇 안되는 상점만이 무관심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지나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죠. 제가 이 곳에 간 이유였던 마뜨료시카 구매도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중국제인 것 같습니다- 이 시장에서 유명하다는 샤슬릭 음식점도, 떠들썩한 시장 풍경도 그저 남의 이야기가 된 것이죠. 하지만 활발한 시장 풍경의 흔적이 곳곳에 조금씩 묻어 있었고, 이 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인 이즈마일로보 크레믈의 아름다운 목재 건물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 같았던 모스크바 여행 11일째에 신선한 즐거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정도는 분명 이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위안이 되겠죠.
마지막 날의 이 실패의 충격을 만회하기 위해 저는 이 시장을 서둘러 빠져나간 후 저는 그 길로 붉은 광장으로 달려가 성 바실리 성당 안을 관람했으며, 숙소로 돌아오기 전엔 쉑섁 버거에 한 번 더 들러 여행 마지막날 지는 해의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 날은 분명 실패였지만, 어쩐지 저녁을 먹는 내내 편안하고 즐거웠습니다. 아마도 텅 빈 시장 골목을 도는 동안 저도 모르는 새 정신 없었던 열흘 간의 여행을 조금씩 정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포스팅을 통해 이즈마일롭스키 시장의 진면목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 빼고는 나무랄 데 없는, 아니 굳이 나무라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미친 여행'이었던 이번 여행의 마무리 답다는 생각을 하며 이렇게 저는 모스크바에서의 열하루 여행 정리를 시작합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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