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보다 먼저 내 발길을 빼앗아버린
노보데비치의 설경
12일간의 여행 기간은 이 도시를 모두 알기에는 너무 짧았지만, 이 곳을 찾은 여느 관광객과 비교하면 비교적 여유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때문에 모스크바의 주요 관광지는 대부분 돌아볼 수 있었는데요. 그 중 빼 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공원입니다. 16세기 러시아 전통 건축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현재까지 러시아의 정신을 상징하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노보데비치 수도원을 찾기로 한 날, 수도원 입구 옆 너른 공간에 마음을 뺏기고 길지 않은 모스크바의 오후 시간을 쪼개 달려갔습니다, 바로 그 곳이 오늘 소개할 '노보데비치 공원'입니다. 가끔은 이렇게 즉흥적인 여행이 필요하죠 :)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는지 이 노보데비치 공원은 노보데비치 수도원 못지 않은 추억을 짧은 시간동안 제 맘에 새겨놓았습니다. 한적한 공원을 걸으며 산책을 하려했던 제 목표와는 달리 갑작스레 폭설이 내렸지만 그마저도 다시 볼 수 없는 멋진 설경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죠, 아마 고생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요 ^^: 동시에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기도 합니다. 물론 백야가 있는 여름에 더 좋겠군요.
놀랍게도 제가 찍은 사진의 장소와 구글맵에 찍힌 장소는 동일한 노보데비치 공원, 그 중에서도 같은 지점입니다. 봄, 여름이면 낙원 같았던 이 곳이 겨울엔 어떻게 변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비교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제가 운이 좋은 건가요?- 오늘은 영하 10도의 비교적 온화한(?) 날씨 속 난 데 없이 내린 폭설과 함께 걸었던 모스크바에서의 겨울 산책 이야기입니다.
노보데비치 공원은 모스크바 주요 관광지이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러시아의 대표 문화재 노보데비치 수도원 곁에 있는 작은 공원입니다. 이런 문화 유산 곁에 현대 러시아인이 쉴 수 있는 '평범한' 공원이 있다는 것이 어쩐지 의외입니다만 붉은 광장과 성 바실리 성당 등 곳곳에 문화 유산이 발에 채이는(?) 모스크바이기에 가능하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노보데비치로 가는 길
모스크바 미뜨로 빨간 노선의 스포르티브나야(Спортивная) 역을 통해 갈 수 있습니다. 전철 역에서 내려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으면 닿을 수 있으니 새삼 러시아 지하철의 '세심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전 미뜨로 관련 포스팅에도 설명했지만 모스크바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은 그 구간 자체도 매우 촘촘하게 되어 있는데다 주요 관광지에 어김없이 전철역이 있어서 굳이 택시나 다른 교통 수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보데비치 공원과 노보데비치 수도원 사이에는 노보데비치 연못이 있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모습은 연못 건너편에서 보아도, 눈발에 반쯤 가려져 있어도 그 위용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고대 유적 근처에 있는 공원이지만 가로수와 조경 등 공원 조성이 잘 되어 있어 시민들의 산책로로 매우 좋아보입니다. 물론 제가 찾은 한겨울 날씨에는 조깅을 하거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구글맵으로 이 곳을 보니 맑은 날씨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군요, 동일한 장소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겨울의 노보데비치 공원은 마치 '설원 체험장' 같았습니다.
건너편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다양한 건물들은 특유의 고풍스러운 건축 스타일로 못 건너 제 마음을 들뜨게 했습니다. 성 바실리 대성당과 함께 러시아 전통 건축 양식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죠.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선 눈에 덮인 이 한겨울의 공원이 저에겐 너무 매력적이었기에 훌쩍 한바퀴를 돌아보고 나서 들어가겠노라 다짐합니다.
산책로 뒷쪽으로 보이는 하얀 벌판은 분명 여름엔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해 주는 노보데비치 '연못'입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땅과 연못 구분 없이 저렇게 하나의 '길'이 되었네요. 이 날 날씨는 길게는 삼십 분, 짧게는 십분마다 햇살과 폭설이 오가는 다분히 '모스크바 겨울' 다운 날씨였습니다. 금방이라도 다시 눈을 흩뿌릴 것 같은 구름 가득한 하늘을 사진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저 표지판을 보니 분명 연못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꽁꽁 언 날이면 조심스럽게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네요.
갑자기 마주친 여행 기간 최대의 눈보라
영하 30여도의 강추위가 지나고 영하 10도 내외의 '온화한' 날씨 -적어도 이 곳 모스크바에선- 가 시작되면서 이 날은 두 벌씩 입던 코트도 한 장으로 줄이고 목도리도 숙소에 놓고 나왔습니다만, 이 쭉 뻗은 노보데비치 공원 산책길을 절반쯤 걸었을 때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설을 맞았습니다. 한국의 겨울 눈과는 제조 과정부터 다르다는 듯 뺨을 세차게 때리는 눈발에 더 이상 한가로운 산책 따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절반가량 온 산책길에선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근처 보이는 나무 아래서 잠시 눈을 피하며 모처럼 가만히 모스크바의 겨울 풍경을 바라봅니다.
어딘가 이 눈이 너무 익숙하고 반가워 보이는 저 학생들은 호수 한가운데서 아이들처럼 눈싸움을 즐기고 있습니다.
꽁꽁 언 연못 위를 즐겁게 뛰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모스크바 산천어 축제 풍경 같습니다 XD
그럼에도 이 곳은 모스크바 최고의 공원 산책길 중 하나
갑자기 만난 폭설은 이 한적한 공원을 진퇴양난의 겨울 벌판으로 만들었지만,
쭉 뻗은 산책로와 가로수를 보니 봄이 시작되면 이 곳이 모스크바 최고의 산책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됩니다. -구글맵 풍경을 보고 배가 아파졌어요-
물론 눈으로 덮인 새하얀 산책로마저도 그런대로 꽤나 운치가 있어서 눈을 피해 서 있는 시간 동안에도 지루하지 않고 몇 장의 사진을 찍었지요.
놀라운 일이지만 이 날에도 유모차를 끌고 손주와 산책을 나오신 할머님이 계셨습니다.
물론 폭설에는 잠시 몸을 피하셨지만, 그래도 이 추위에 아이를 데리고 산책 나오실 생각을 하시다니, 역시 러시아는 러시아인가 봅니다.
제가 다시 이 곳을 봄, 여름에 찾게 된다면 한국산 은빛 돗자리를 깔고 누워 이 날의 설움을 종일 풀고 싶습니다. 그 땐 백야로 겨울에 받지 못한 햇살까지 실컷 받을 수 있겠죠? 여러 이유로, 이 노보데비치 공원은 꼭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곳입니다. 어쩌면 노보데비치 수도원보다 더요.
몇 분간 세차게 내린 눈이 벌써 이만큼이나 쌓였습니다. 겨울 모스크바에는 시내 도로만 아니라면 어디든 저 정도 쌓인 눈은 버스 정류장에 버스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멋진 나무를 하나 발견하고 들어오던 길에, 지난 제 발자국을 보며 잠시 제가 수도원을 찾아 이 곳에 왔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어딘가에 러시안 불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지요
눈밭을 헤치고 들어오게 만든 잘 생긴 나무 한 그루. 폭설 속에서 홀로 우뚝 선 모습이 마치 이 공원의 제 모습을 보는 것 같..다기 보단 한적한 이 공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흠뻑 젖은 이 카메라가 당시 제 모습과 더 비슷합니다.
이 쯤에서 모스크바 겨울 여행 준비 Tip 하나
이 날 폭설을 맞고, 게다가 숲 구경 한답시고 눈밭을 헤집고 다니는 바람에 제 부츠는 사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모스크바 날씨에 대해 한 말씀 덧붙이자면, 겨울에 줄곧 눈이 오는 날씨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은 가죽으로 된 재킷이나 구두 등을 잘 신지 않습니다.
수분에 약한 가죽의 특성상 금방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인데요, 더불어 울 재킷이나 코트도 수분에 약하기 때문에 대부분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파카나 수분에 강한 모피 코트를 많이 입습니다. 이 점을 간과했던 저는 아끼는 코트와 구두를 이 곳에서 많이 손상시켜버렸죠. 겨울철 모스크바 여행에선 수분에 강한 옷과 신발을 챙기세요
이내 활짝 웃어 준 변덕스러운 날씨
이 곳의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한다 헤어지자는 말을 번갈아 내뱉는 앙칼진 러시아 여인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혹독한 눈발을 흩뿌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이렇게 새파란 미소를 보여주다니요. 그럼에도 저는 이게 밀땅인 것을 알면서도 가슴 두근거려하는 못난 남정네가 되어 맑은 모스크바 하늘이 잘 보이는 대로변으로 달려갑니다. 바다와는 한참 먼 이 도시의 겨울 날씨는 마치 제주의 날씨를 연상시켰습니다.
폭설로 새하얀 눈밭이 된 노보데비치 공원의 모습도 나름 아름답고 특별하다며 위로했던 제가 멋쩍어지게, 고개를 돌려 걸어온 길을보니 파란 하늘 아래 이 공원의 모습은 마치 다른 곳 같습니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시선은 좀 더 또렷해졌죠.
잠시 눈을 피했던 할머니와 아이도 다시 산책을 시작하네요. 영하의 날씨에도 야외 수영을 즐긴다는 러시아답게
이 곳의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추위 대응 훈련'을 하는 걸까요?
다리를 보니 이 곳이 연못이었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연인들의 약속은 어디에나 똑같다
어딘가 익숙한 이 풍경은 이 먼 땅 모스크바의 공원입니다. 연인들의 부질없는(?) 약속의 상징인 이 자물쇠들이 이 곳 노보데비치 공원의 다리에도 삼삼오오 매여져 있습니다. 남산처럼 주렁주렁 남발된 약속들은 아니지만 세계 어느 곳이나 사랑하는 이들의 소망이란 건, 그리고 그 바람을 표현하는 방법은 통하는 구석이 있나 봅니다. 무뚝뚝한 러시아 사람들에게 이런 로맨틱한 구석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많지 않아 더 간절해 보이는 이 약속과 소망들은 꼭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언젠간 저도 이 곳에 사랑하는 이와 이름을 적은 자물쇠를 굳게 채울 수 있길 바라며, 그 땐 부담스럽게 크고 화려한 것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눈이 그치고 구름이 반쯤 걷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보다 더 멋진 풍경을 만들죠,
멋지게 연출 된 하늘 아래서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성곽이 그림처럼 빛나 보입니다. 이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만약 이 노보데비치 공원에 오지 않고 바로 수도원으로 갔으면 이런 멋진 풍경과 오전의 설경을 볼 수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에 괜히 뿌듯해집니다. 이제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으로 빨리 달려가고 싶어집니다. 더 늦기 전에, 다시 폭설이 쏟아지기 전에 말이죠.
Forget me not, 노보데비치 공원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모스크바 여행의 필수 관광지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성 바실리 대성당과 함께 러시아 전통 건축 양식을 가장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러시아 정교회의 다양한 역사적 흔적들과 현재까지 이어진 정신을 관광객의 눈으로, 때로는 그 속에 참여해서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서 큰 가치가 있기 때문인데요. 직접 이 곳을 찾은 저는 수도원 옆 이 공원에도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역사적 유적지 곁에 있는 공원이지만 전혀 고리타분하거나 불편하지 않고, 현재 모스크바의 삶들과 함께 숨쉬는 친근한 공원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가 방문할 때에는 혹독한 겨울 추위에 폭설까지 만나 이 공원의 여유를 100% 즐기지 못했지만, 봄이 오고 이 공원에 덮인 눈이 녹아 녹색이 채워지게 된다면 굳이 수목원에 건너가지 않아도 하루 종일 앉아 모스크비치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덤으로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가 이 공원을 따로 포스팅 한 이유도, 적어도 제 포스팅을 통해 이 공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분이 생기길 바랐기 때문이구요.
눈과 햇살을 변덕스럽게 반복하며 오전 내 저를 흔든 특별한 산책을 끝내고, 저는 이제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입성합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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