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도시 모스크바에 왔다면
칸딘스키 정도는 만나고 가야지?
여행은 이제 막바지에 다다르고, 출발 전 귀동냥으로 들었던 유명한 모스크바의 관광지들을 한 번씩 가보았다고 생각될 때쯤, 어딘가 허전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예술의 나라 러시아의 수도에 와서 여지껏 제대로 된 전시 미술 전시를 하나 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칸딘스키에 대한 수업을 들으며 러시아와 러시아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떠오르며 이 여행이 끝나기 전에 제대로 된 미술 전시, '러시아의 보물'을 만나고 왔습니다. 바로 러시아 강 건너 남쪽, 고리키 공원 건너편에 있는 Central House of Artists, 그리고 트레티야코브 미술관(Третьяковская Галерея)이었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큰 미술관 건물을 본 적이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아마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술의 전당 정도가 견줄만 하지만 그래도 이에 비하지는 못합니다. 건물의 규모에서부터 예술로 세계 역사에 이름을 새긴 러시아의 위용이 드러납니다.
제가 찾은 이 거대한 건물은 현대 예술 전시와 공연 등이 열리는 Central House of Artists와 트레티야코브 미술관이 한 건물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트레티야코브 미술관은 모스크바 중심부의 미술관/박물관 밀집 지역에 본관이 있고, 이 건물에 별관 겸 전시관이 있다고 하는데요, 3층 규모의 건물에는 층마다 다양한 전시가 끊임없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느낀 모스크바와 서울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문화 공간' 즉 미술관과 박물관의 숫자와 규모, 접근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스크바는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골목마다 크고 작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하나씩 찾을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오랜 시간동안 역사와 예술을 존중하는 사고가 국민성으로 자리잡았으며, 그 중에서도 그림과 음악, 소설, 시 등으로 대표되는 순수 예술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애정은 남다릅니다. 그만큼 수준 높은 예술가들이 러시아 역사를 채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을 몹시 사랑하는 현재가 있어 앞으로도 그러한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http://tretyakovgallery.ru
갤러리 건물 안에 위치한 트레티야코브 미술관과 Central House of Artists의 홈페이지입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트레티야코브 갤러리는 회화를 포함한 전통/순수 예술, CHA는 음악 공연 등의 현대 예술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방문했던 날은 CHA에서 러시아 근대 미술사에 큰 공헌을 한 한 수집가의 소장품들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고, 트레티야코브에선 칸딘스키와 샤갈 등 유명작가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렸으니 그 상반된 성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풍경부터 다른, '예술의 집'으로 가는 길
마치 파리의 거리 미술 시장과도 같은 이 풍경은 놀랍게도 고리키 공원과 트레티야코브 미술관을 연결하는 지하도입니다. 미술관으로 가는 지하도답게 다양한 개인 작가들의 그림을 파는 작은 샵들이 긴 지하도의 끝에서 끝까지 빽빽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한 전통적인 유화부터 강렬한 색상과 기법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팝아트까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진심이 담긴 예술 작품이라면 무엇이든 내어 놓고, 감상하고, 구매하는 문화가 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제 주위에선 '거리의 캐리커쳐' 정도로만 볼 수 있었던 거리 예술이 이 곳에서는 이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군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악한 사람은 없다는데, 이 곳 사람들이 그럴까요?
어쩌면 갤러리로 가는 이 지하도부터 이미 전시는 시작되었다 싶을 정도로, 지나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이 그림을 하나하나 감상하고 샵들을 들렀다가는 하루가 다 지나버릴 것 같아 지나쳐야 하는 것이 아쉬웠어요. 근처에 방문할 일이 있으신 분들은 꼭 이 지하도 그림 시장을 구경 가 보시기 바랍니다. 운 좋으면 맘에 꼭 드는 그림을 좋은 가격에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 곳이 예술가들이 머무는 응접실일까요?
예술가의 집은 그 입구부터 사뭇 다릅니다. 매표소를 지나 2층에 들어서니 예술가의 집에 왔음을 알리는 실내 설치 예술이 저를 반깁니다. 로비 전체를 실제 피아노들의 다양한 형태로 채운 이 풍경은 실제 유명 예술가들이 사용했던 악기들로 구성한 것이라고 하네요. 그래서 어딘가 더욱 무게감이 느껴지고, 이 곳에서 숨 쉬는 역사 속 예술가들의 영혼을 보는 것 같아 특별한 기분입니다.
모스크바 관광의 법칙 - '사진 촬영권'을 구매하세요
모스크바 여행, 그리고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팁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주요 관광지와 박물관들은 입장료와 함께 내부 사진 촬영권을 별도로 판매한다는 것입니다. 관광객이 전시장 내부와 전시 작품 등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입장권과 함께 이 촬영권을 꼭 구매해야 하는데요, 복잡하고 정숙한 전시장에서 이 촬영권 구매 여부를 어떻게 확인할까 궁금했는데 정답은 바로 저 노란 스티커였습니다. 촬영권 구매시 받는 저 스티커를 잘 보이는 곳에 붙이면 각 전시장의 관리원 분들이 확인하고 사진 촬영을 허락해 줍니다. 어렵게 이 먼 곳까지 왔는데 갤러리의 멋진 실내 인테리어와 작품들을 찍는 것도 여행 추억의 큰 부분이 되겠죠. 그래서 이 트레티야코브 미술관에 입장하실 때는 꼭 이 촬영권을 함께 구매하시기 바랍니다. 가격은 대략 100-150 루블 내외로 기억합니다.
앗, 촬영이 불가능한 전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갤러리의 촬영권을 구매하더라도 일부 전시는 촬영을 금지하기도 합니다. 이 날 2층에서 열린 전시는 모스크바 예술 작품을 다수 소장한 유명 사업가의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것이었는데요, 전시의 의미와 작품들의 가치 때문인지 전시장 내부 촬영이 모두 금지되었습니다. 작품 수도 무척 많고, 유명 작가의 멋진 작품들이 많았지만 눈으로만 볼 수 밖에 없어 아쉬웠습니다, 지금 이렇게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그 느낌은 이미 많이 증발해버렸으니까요.
이 곳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는 칸딘스키와 샤갈을 만나다
유명 회화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3층의 전시는 다행히 촬영이 가능했습니다. 3층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는 이 대형 갤러리는 엄청난 규모에도 작품이 좁은 간격으로 빈 틈 없이 배치될 만큼 엄청난 수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의 수준 못지 않게 이 예술품들의 물량(?)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더불어 마치 그림과 색 경쟁을 하듯 강렬한 파랑색의 갤러리 벽면은 더욱 놀라웠는데요. 흔히 갤러리 하면 흰색 혹은 회색 정도로만 기억하는 벽면 색상을 이렇게 과감하게 선택하는 것에서, 예술의 나라 러시아의 힘이 느껴집니다.
이 트레티야코브 미술관 3층의 그림들을 모두 감상하려면 족히 서너 시간은 걸릴 정도로 그 숫자가 어마어마 했으며, 숫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하나가 미술엔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매우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라 사실 일찌감치 모두 다 감상하는 것은 포기하고 이 갤러리의 느낌과 전시 분위기를 즐기는 데 집중했습니다. 다행히 이 날은 전시장에 사람이 많지 않아 각 전시실을 자유로이 왕복하며 마음에 드는 그림을 깊이 있게 볼 수 있었는데요, 우리가 인터넷이나 TV 프로그램을 통해 보았던 유명한 작품들이 너무 흔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한국에선 이 그림 중의 몇 점이라도 보기 위해 전시를 손꼽아 기다리고 줄을 서서 감상하는데, 이 나라 사람들 이런 점에선, 예술에 있어서만큼 사치스러울만큼 누리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림을 잘 모르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미술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은 특별한 장르와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전시실마다 다른 배경 혹은 구성으로 짜여져 있었습니다. 위 사진 처럼 그림과 조각품이 함께 전시된 곳도 있었고, 어느 전시실은 전통 회화와 상반된 느낌을 주는 현대 설치 미술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이 층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 만으로 러시아의 보물이라고 해도 손색 없을 유명 작가들의 역사적인 작품부터, 현대 미술 시대를 채우는 예술품들을 모두 감상할 수 있으니, 전시에 익숙하지 않은 저에겐 조금 혼란스럽고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예술을 쫓아 이 곳에 온 여행객에게는 이보다 더 반가울 수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겠더군요. 그들에게 이건 마치 호텔 뷔페 같은 느낌일까요?
벽면을 가득 채운 칸딘스키의 그림, 마침 모스크바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감상한 '칸딘스키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이 그림을 본 적이 있는 터라 더욱 반가웠습니다. 이런 대단한 그림을 한국에서 볼 기회는 아마 극히 드물겠지요. 여기선 이렇게 '이런 그림 따위야'라는 듯 딴 짓 하는 관리원만 신경쓰지 않는다면 맘껏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침 촬영권도 샀으니 이 앞에서 기념 촬영도 할 수 있구요.
위 작품은 이 날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캔버스에 회화 작품을 그리고 위를 검정색으로 덮어, 검정 도료가 벗겨지며 원래 그림을 조금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미술의 표현이 제 기준에선 매우 파격적이라 기억에 남았습니다.
칸딘스키, 구성 No.7
이 갤러리에서라면 그 유명한 칸딘스키의 그림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바짝 붙어서, 질릴 때까지 감상하고 옆에서 기념 사진도 찍을 수 있습니다. 새삼 한국의 전시는 대부분 작품이나 내부 촬영을 엄격히 통제해 그 감동과 여운이 너무 짧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진으로 남겨 놓으니 그 날의 기억을 직접 보았던 순간만큼은 아니지만 어렴풋이 다시 느낄 수 있네요. 칸딘스키의 구성 시리즈, 붉은 광장 등 도록이나 인터넷 사진 정도로 볼 수 있는 작품을 직접 보았을 때의 감흥은 당연하게도 전혀 다른 그림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색은 더욱 선명하고 색의 경계나 형태 뿐 아니라 물감과 캔버스가 주는 질감까지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의 몇몇 작품은 '얼굴 도장'을 찍는 데 급급했다면, 칸딘스키의 그림만큼은 앞에서, 옆에서, 지나쳤다 다시 돌아와서 상세히 감상했습니다.
이렇게 저도 몇 안되는 제 사진을 이 곳에서 건졌습니다 :)
이 작품은 샤갈의 유명한 작품 Sobre la ciudad 이죠.
그렇게 모스크바 예술과의 서툰 대화를 끝내고 나니 짧은 해가 지고 밤이 되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오후 시간을 실내에서 보낸 것이 다른 곳이었다면 무척 아까웠겠지만 이 갤러리와 전시장의 수 많은 작품들을 보며 새로운 즐거움을 느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의 '멋진 관광'이 되었습니다.
다리보다 머리가 아픈 예술로의 여행
하지만 모스크바이기에 꼭 거쳐야 할 길
평소 예술과 러시아의 유명 작가들에 관심이 많았다면, 그리고 그 작품들을 눈 앞에서 생생하게 볼 기회를 위해 모스크바를 찾은 이들은 물론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 곳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저와 같이 구글 이미지 검색을 통해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했던 저 같은 '예술 테러리스트'도 이 곳 만큼은 꼭 하루, 아니 반나절 시간을 내어 전시를 한 바퀴 둘러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이렇게 묘한 즐거움을 준다는 것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거든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미술관을 찾아 넋을 놓고 미술품을 감상하는 러시아 남성과 목발을 짚고 각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노인의 열정 등 러시아인의 예술에 대한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것이 원동력이 되어 현재까지 수 많은 역사적인 예술가들을 배출했고, 현재도 예술을 이야기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나라가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저 거리 풍경을 최고로 좋아하는 거리 여행자의 12일 여행 중 단 한 번 뿐이었던 미술전 관람이었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이 깊이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아직까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D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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