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고 집에서 나와 저녁은 타이베이에서 먹는다, 생각하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부터 잔뜩 힘을 주고 옷부터 편하게 갈아 입어야 하는 유럽 여행보다 때로는 이런 여행이 더 가볍고 즐거울 때가 있습니다. 오후 한시 이십분 비행기를 타고 김포에서 타이베이 송산 공항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푼 시각이 오후 다섯시 남짓, 기내에서 썩 괜찮은 기내식을 먹었지만 때가 되니 배가 고픈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게다가 시차도 거의 없는 곳이라 때맞춰 배꼽 시계가 알람을 울립니다.
사실 '딘 타이 펑'이나 '우육면' 정도만 알고 왔지 타이베이에서 뭘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보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네요. 그래서 좁은 호텔 1인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주변의 맛집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숙소가 타이베이 메인 스테이션에 있는 것이 행운이었던지 주변에 꽤 많은 유명 레스토랑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중 눈에 띈 것이 평소 좋아하던 샤부샤부. 정확히 말하면 중국식 샤부샤부인 '훠궈' 음식점이었습니다. 이름이 '쥐(聚, 취)'입니다.
100 대만 台北市中正區 Hengyang Rd, 3號
숙소인 포시패커 호텔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얼얼바 평화 기념공원 입구 앞에서 훠궈 쥐(Giguo)를 찾을 수 있습니다. 2층에 위치해 입구를 찾기가 수월한 편은 아니지만 문 앞에 예약 상황을 체크 하시는 점원이 대기 중이니 물어보면 친절하게 안내해 주십니다. 타이베이 메인역 뒷쪽 한적한 길에 있어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물론 식사 시간에는 손님들로 가득합니다만.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으시는 곳이라 그런지 한국어 메뉴판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자세한 설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 찾으시는 분들은 훠궈와 후식이 포함된 세트 메뉴를 드시면 안전하고 맛있게 식사하실 수 있겠습니다. 정통 중국식 훠궈라기보단 일본식 샤부샤부에 훠궈의 특징인 홍탕을 접목한 퓨전 훠궈에 속하는데 깔끔한 맛 때문에 현지인들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트 메뉴를 선택하면 고기와 육수 종류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디저트와 함께 나오는 음료도 직접 선택할 수 있죠. 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날은 돼지고기를 골랐습니다. 그리고 평소 궁금했던 홍탕의 맛을 느껴보고자 다시마 마라 훠궈 육수를 선택했습니다. 가격은 398 타이완 달러, 한화로 약 16000원 정도입니다. 세금이 10% 붙으니 2만원 안쪽이 되겠네요. 타이베이 시내에 저렴한 무한리필 훠궈집이 있지만 첫경험은 이렇게 정갈하게 마련된 세트 메뉴로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과 연인 그리고 업무를 마친 회사원들의 저녁 식사 풍경이 많이 보였습니다. 깔끔한 실내 인테리어와 정갈한 상차림 등이 제가 그동안 생각하던 시끌벅적하고 다소 번잡한 훠궈집과는 따른 깔끔한 느낌인데요, 아마도 대만 음식 문화가 일본의 영향을 적지않게 받은 탓도 있겠죠. 이 곳의 훠궈는 일본 샤부샤부와 중국 훠궈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느낌입니다. 따라서 저같은 훠궈 입문자에게 적합합니다.
혼자 와서 훠궈를 즐기는 분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400 타이완 달러에 푸짐하게 혼자 즐길 수 있는 세트 메뉴가 있으니 저처럼 혼자 여행하는 분들에겐 반가운 식당입니다. 상차림도 마음에 들고 종종 점원이 와서 부족한 것은 없는지 물어보는 친절함도 경험 했습니다. 대만에서의 첫 식사로 그리고 사람들과의 첫 만남으로서 아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곧 이어 한 상 가득 차려진 훠궈 세트. 빨간 마라탕을 중심으로 돼지고기와 각종 채소 그리고 마지막에 먹을 다시마 우동면과 자몽 스무디 음료까지 그럴싸한 풀 코스입니다. 색깔부터 담음새까지 무척 마음에 들어 식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이 곳이 마음에 들어버렸죠.
사실 훠궈는 대만에 와서야 처음 먹어보았습니다. 이 빨간 탕이 어떤 맛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즐겨 먹었던 일본식 샤부샤부에 크게 불만이 없었고 중화권 음식에 대한 불신도 옅게 깔려 있었거든요. 제 앞에서 보글보글 끓는 홍탕을 보면서도 사실 이 생각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습니다. '대체 여기 뭐가 들어있는거야' '저기 동동 뜬 이상한 것들은 뭐지' '기름이 잔뜩 뜬 게 건강에는 안 좋겠다.' 나중에 이것이 모두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만 이 때까지는 그랬습니다.
버섯과 각종 채소, 두부와 토마토, 어묵, 옥수수까지 다채롭게 담긴 채소는 고기와 함께 훠궈를 즐기기 적당한 양과 구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끓는 육수에 옥수수를 담궈 익혀 먹는다는 것이 -그것도 매운 옥수수라니- 영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타이베이에 왔으니 대만식으로 먹어봐야겠죠. 신선한 채소는 빛깔부터 식욕을 자극합니다.
평소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 그보단 닭고기를 좋아하지만 훠궈는 왠지 소고기보다는 돼지고기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돼지고기를 주문했습니다. 삼겹살로 보이는 부위는 아쉽게도 제가 그리 선호하지 않는 부위입니다. 지방이 많아서요. 물론 먹을 때 맛은 있겠습니다만.
다음에는 살치살을 먹어 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식이 가미된 퓨전 훠궈라 그런지 양고기는 선택 옵션에 없더군요. 고기 양은 마니아 분들에게는 조금 아쉬울 수 있겠습니다만 전체 세트 구성을 생각하면 부족한 양은 아닙니다.
함께 나온 자몽 요거트 스무디는 식사 전이나 식사 후에 마시면 입안을 상큼하고 깔끔하게 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매운 훠궈 육수와 함께 먹으면 입 안에 다소 혼란이 오게되니 식사와 함께 마시는 것은 가급적 피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식사 시작.
빨갛게 익어가는 마라 홍탕을 먼저 숟가락으로 조금 떠 먹어보니
'어어-!'
처음 먹는 맛인데 끝맛이 묘하게 중독성이 있습니다. 채소와 고기를 넣는 것을 잊고 연거푸 몇 숟갈을 떠먹었습니다.
사실 이 날 저녁 식사를 계기로 훠궈에 눈을 떠 타이베이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몇 번 훠궈집을 더 찾아 다녔는데 그 곳과 비교해 이 훠궈 쥐의 마라 홍탕의 맛은 마라의 매콤함과 칼칼함을 베이스로 일본식 다시 육수를 더해 상당히 부드러운 편에 속합니다. 좋게 말하면 깔끔한 맛 나쁘게 말하면 오리지널 훠궈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맛이죠. 처음 마라홍탕을 맛보는 분들에겐 '별 것 아니네' 라며 수월하게 입문하는 계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깊고 진한 마라탕의 원래 맛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다소 심심하게 느낄 수 있겠습니다. 확실히 이 육수가 일본과 중국의 중간쯤에 있습니다. 몇몇 대만 음식이 그렇듯이요.
끓는 육수에 채소를 넣고 끓이며 고기를 익혀 먹습니다. 이 방식이야 이미 샤부샤부를 통해 알고 있으니 첫경험이더라도 어렵지 않습니다.
잘 익은 고기를 두가지 소스에 찍어 먹게 됩니다. 한쪽은 일본식에 가까운 간장 베이스 소스, 나머지 하나는 중국식 훠궈 소스에 가까운 고소한 소스입니다. 취향별로 드셔도 되지만 양쪽 번갈아 드시는 게 훠궈 쥐의 매력이 되겠죠.
세트 메뉴에는 다져진 완자 반죽이 함께 나옵니다. 이 완자를 조금씩 떼 마라탕에 넣어 익혀 먹으면 또 하나의 별미가 탄생합니다. 돼지고기가 맛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고기보다는 이 완자가 주는 식감이며 감칠맛이 더 좋았습니다. 맛 정도 보라고 조금 나오는 세트메뉴라 금방 없어졌다는 것이 아쉬울만큼.
고기와 채소, 완자를 다 먹으면 면 사리를 넣고 국수를 즐기게 됩니다. 한국의 여러 음식들이 그렇듯 이 국수 사리의 맛은 이미 보장이 되어 있습니다. 채소와 고기 덕분에 더 진해진 마라탕에 말아먹는 다시마 우동의 맛도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후식이 나옵니다. 저는 검은깨 푸딩을 선택했는데, 고소한 맛과 부드러운 식감 때문에 다소 자극적일 수 있는 식사를 깔끔하게 정리해 줍니다. 체면 차리지 않고 그릇 긁는 소리를 벅벅 내며 바닥까지 긁어 먹었어요.
"이렇게 입이 깔끔해지면 다시 식사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잖아."
이렇게 대만에서의 첫번째 저녁 식사가 끝났습니다. 마치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된 듯 거하게 차려진 한 상 앞에 혼자 앉아 웃고 감탄하고 맛을 평가하다가 서울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사진도 찍어 보내며 그렇게 즐겼습니다. 대만 여행 중 손에 꼽을만큼 멋진 식사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혼자 438 타이완 달러 어치의 식사라면 이 곳에서는 다소 비싼 축에 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분위기와 구성, 맛이라면 타이베이까지 날아 오느라 고생한 내게 주는 선물로 아까울 것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불어 나중에 좋은 사람과 함께 온다면 그때도 첫번째 식사로 이곳에 오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놓고 배까지 든든하게 채우면 이제 이 곳이 지구 어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여행이 그리고 설렘이 점점 상승 곡선을 그리는 시간입니다.
특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행복, 2016 타이베이 (Taipei)
#0 타이페이 여행의 시작- 유독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부족한 준비 때문일까?
#0.5 특별하지 않음에서 오는 행복, 2016년 겨울의 타이페이
#1 출발, 타이베이 - 수월한 여행을 위한 준비해야 할 것들 (통신, 교통, 숙소)
#3 나홀로 타이베이 여행자를 위한 숙소 추천, 포시패커 호텔 (Poshpacker hotel)
#4 저렴한 가격 빼고는 추천하지 않는 타이베이 메이스테이 호텔 (Meistay hotel)
#7 대만 현지에서 즐기는 딘 타이 펑의 샤오롱바오 (타이베이 딘 타이 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