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키 크룸로프,
중세 보헤미아 골목을 거닐며
내내 눈에 밟혔지만 기어코 프라하를 떠나 짧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세시간쯤 달려 도착한 체코 속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는 고요했고, 평화로웠습니다. 중간중간 포장이 되지 않은 돌길위로 끌려가는 트렁크의 요란한 소리만 빼면 말이죠.
체코의 옛 이름은 보헤미아라고 합니다. 말로만 듣던 그 보헤미안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니 제가 사랑하는 이 도시, 나라가 다시 한 번 눈물나게 아름다워 보입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남부 보헤미아주의 대표 도시로 인근 지역의 무역 거점 역할을 담당하며 번성했던 도시라고 합니다. 프라하 성 다음으로 규모가 큰 체스키 크룸로프 성 그리고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과 같은 이름의 성당이 이 도시에 있는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인구 만 오천명이 남은 시골 도시가 됐지만,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라는 빛나는 이름으로 그 가치를 여전히 뽐내고 있습니다.
오후 세 시, 버스가 낯선 정류장에 도착했습니다. 낡은 표지판에 적힌 도시의 이름은 다행히 아직 뜯겨 나가지 않았군요. 마침 구름 사이로 반짝 해가 '반짝' 하고 비쳤습니다.
걸음이 도시와 가까워질 수록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것이 마치 차원의 문이 열리며 시간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정류장에서 십여 분, 동화 속 도시는 그렇게 점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와아아-
사실 걸어오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프라하를 그리워했습니다. 내가 왜 이 소도시에 1박 2일의 시간을 투자했을까 후회도 했고, 프라하에 돌아가 다시 한국으로 영영 돌아갈 때까지 남은 시간을 계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눈 앞을 가린 현대식 가옥들이 어느 순간 걷히며 눈 앞에 도시 전경이 펼쳐지는 순간 저도 모르게 '와아'하는 탄성을 지르며 뜀과 걸음 사이의 속도로 달렸습니다. 사선으로 맨 미니백이 힘을 내라며 등을 찰싹찰싹 때리더군요. 주황색 지붕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소도시 전경이며 가운데 우뚝 솟은 성 그리고 우아하게 굽이치는 개울까지. 말로만 듣던 '동화 속 도시'는 기대보다 저를 더 황홀하게 했습니다. 상상보다 현실이 더 멋진 일은 흔치 않는데 말입니다.
마을 입구 어귀에서 첫번째로 만나는 전망대에는 체스키 크룸로프의 도시 전경이 그려진 지도가 있습니다. 마치 신이 엄지 손가락을 꾹 눌러 만든듯 육지의 형태가 오묘합니다. 이대로 수도 프라하까지 이어진다는 블타바(VLTAVA)가 만드는 곡선은 비현실처럼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블타바 강을 기준으로 체스키 크룸로프 성이 있는 동부와 스보르노스티 광장이 있는 서부로 나뉩니다. 두 지역을 잇는 '이발사의 다리' 역시 유명한 관광 명소입니다. 지도에 그려진 도시의 모습역시 방에 걸어놓고 싶을만큼 아름답지만, 사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그림이나 사진 어떤것도 제대로 표현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체스키 크룸로프 첫날,
보헤미안의 발걸음을 따라 산책을 즐깁니다.
- 체스키 크룸로프 성(왼쪽)과 전망대에서 본 전경(오른쪽) - 새로운 도시, 낯선 길에서 저는 킁킁대며 냄새를 맡든 크고작은 골목을 일일이 파고들며 도시만의 향취를 즐깁니다. 마음과 기억 속에 새깁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그 향이 유독 짙은 도시로 기억하는데, 그건 아마 이 도시가 품은 깊고 긴 시간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도시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솟은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그 색과 문양, 실루엣의 화려함이 프라하에서 보던 것과 다르면서도 기품이 있습니다. 수백년의 세월을 지내며 몇 번의 덧칠을 했겠지만 그것으로 가릴 수 없는 힘이 느껴집니다. 체스키 크룸로프 성은 현재는 도시 전체를 발 아래 놓고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운영중입니다. 굽이치는 블타바의 곡선과 주황빛 선명한 중세 유럽 건물들의 향연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어 인기가 높습니다. |
- 스보르노스티 광장 (Námestí Svornosti) -
프라하에 구시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이 있다면 체스키 크룸로프에는 스보르노스티(Námestí Svornosti) 광장이 있습니다. 가옥과 상점이 몰린 도심지 중앙에 위치한 것과 주변으로 중세 유럽 건물들의 우아한 실루엣을 감상할 수 있는 점이 꼭 닮았습니다. 주변 건물은 대부분 기념품 상점과 호텔인데, 이 역시 수백년 전 지어진 건물을 내부만 고쳐 사용한다고 하니, 하룻밤 묵는 것도 아주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광장의 아침'
체스키 크룸로프의 산책은 이 스보르노스티 광장에서 시작되고 또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걷다보면 어느새 발걸음이 이 광장에 닿습니다. 특별한 것 없는 광장일 뿐이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이 동화 속을 조금만 걸어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중세 유럽으로의 시간여행
1박 2일의 시간, 오후에 도착해서 다음날 오후에 떠났으니 얼추 24시간. 이 정도면 웬만큼 게으른 여행자가 아니고서야 소도시 체스키 크룸로프 곳곳을 모두 둘러보는 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 역시 해가 질 때까지 체스키 크룸로프 성과 전망대를, 해가 진 후와 다음날 아침 그리고 떠나기 직전까지 이 작은 도시의 골목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발걸음으로 칠하듯 다녔습니다. 앞서 설명했던 체스키 크룸로프의 주요 관광지 체스키 크룸로프 성과 이발사의 다리, 스보르노스티 광장 모두 훌륭했지만 막상 도시를 떠나려니, 그리고 프라하로 돌아오니 간절히 생각나고 또 그리운 것은 수백년 전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체스키 크룸로프의 크고작은 골목길이었습니다. 곳곳에 돌이 깨지고 벽이 갈라진 낡은 골목을 걷다보니 어느새 이 도시의 이름은 물론 여행이라는 것조차 잊고 그저 산책과 눈 앞의 풍경들을 즐기게 됐으니까요. 체스키 크룸로프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은 '시간 여행'이라는 제목은 그 곳에서 제가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또 어떤 길은 목구멍이 울컥할 정도로 안쓰럽습니다. 날씨가 화창하면 영화 속에 있는 것 같고, 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소설가의 펜 끝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을 이겨낸 도시는 그만큼 넓은 폭의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머문 1박 2일동안 느낀 감정들이 다른 도시에서 머문 4박 5일간 느낀 것보다 몇 배나 더 다양하다고 느낄 정도니까요. 개인적으로는 해 질 무렵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체스키 크룸로프의 골목길이 기억에 남습니다. 상점들과 가로등은 하나둘씩 붉은 조명을 켜고, 골목에는 조금씩 인적이 흐려집니다. 길 끝에 우뚝 솟은 체스키 크룸로프 성을 보며 돌로 된 길을 밟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다행히 웬만한 골목에선 항상 성의 첨탑이 보였습니다.
구석구석, 멋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도시입니다.
보이는 모두가 동화, 들리는 모두가 음악
HOTEL(호텔)이란 철자가 이토록 낭만적으로 보이는 도시가 또 있을까요? 아무렇게나 내린 빛이 중세 유럽의 건물에 닿으니 그대로 멋진 실루엣이 됩니다. 수백년 된 시간의 흔적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특별하게 느끼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체스키 크룸로프는 프라하에 비해 작고 낡은 도시였지만 그래서 더 천천히 그리고 유심히 볼 수 있었고,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었습니다. 거리에 흐르는 연주는 흡사 오직 저만을 위한 것 같아 황홀하기까지 했습니다. 상점 건물과 길에 세워진 소화전, 깨진 벽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 제 모습을 보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저게 뭐라고 사진을 찍지?'
" 이 도시만의 특별한 감성이 좋았습니다 "
시간이 멈춘 도시라는 수식어가 더없이 잘 어울리지만, 사실 현대의 체스키 크룸로프는 전 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을 위한 기념품 숍과 식당, 호텔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범한 관광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도시의 풍경과 건축물들은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가치가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한가로운 '산책'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인 것은 이 많은 상점들과 호텔들이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이 도시의 감성 혹은 정취를 철저하게 지키는 선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낡은 골목 풍경에 생기를 불어 넣기도 하고요. 그 옛날 중세 유럽에서도 이 도시에는 수많은 호텔과 레스토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엔 '장삿속'에 아쉬움이 느껴지더라도 '결국 이것도 이 도시의 삶이지' 혹은 '역사의 한 페이지야'라고 생각하니 이전보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도시에 도착한 후 한참동안 현대식 인테리어를 피해 낡고 오래된 것들만 사진을 찍었는데, 마음이 조금 풀리니 이들의 멋스러운 조화가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즐기는 도시의 풍경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마그네틱 기념품, 체스키 크룸로프에도 물론 있습니다. 대부분 이 도시의 랜드마크인 체스키 크룸로프 성을 주인공으로 그림같은 도시 풍경을 그리고 있는데다 종류가 무척 많아서 구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세고 있으니 푸근한 인상의 동유럽 남성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다섯개 사면 하나 더"
한국인이 정말 많이 오긴 하나 봅니다.
골목길을 걷는 것을 잠시 멈추고 지나친 상점을 하나하나 돌아보니 생각보다 매력적인 것들이 많습니다. 고국에 있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물할 기념품은 물론, 나중에 방에 놓고 싶은 인형과 탁상 조명, 하나하나 그 맛을 궁금하게 하는 초콜릿과 프라하에서 입맛만 다셨던 체코 전통 빵 뜨르들로(trdlo) 까지. 개성있는 모양이 눈길을 끈 초콜릿 숍 봉봉(Bon Bon)은 가격이 비싸 선물용으로만 구매했지만 남은 한 손에 갓 구운 아몬드 뜨르들로들 들고 씹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발사의 다리에 잠시 도시 풍경을 바라봅니다. 다리가 아파옵니다. 짧지만 강렬한 중세 보헤미아 탐험이었습니다.
걸음은 다시 스보르노스티 광장으로
그렇게 걷다보니 걸음은 어느새 스보르노스티 광장에 닿았습니다. 일몰을 얼마 앞둔 마지막 햇살이 환하게 내리쬐며 광장 구석구석을 밝힙니다. 이제 막 도착한 혹은 떠나려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 광장에 모여 인사를 나누고 기념 사진을 촬영합니다. 문득 1박 2일을 머물기로 한 결정이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대로 떠나기엔 아직 남은 몇 개의 골목과 그보다 훨씬 많을 감정들이 너무 아쉬우니까요. 문득 프라하의 숙소에서 챙겨 먹은 아침 외에는 종일 먹은 것이 뜨르들로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연스레 그간 몰랐던 허기가 단숨에 머리를 콕콕 찌릅니다. 멋진 저녁 만찬만 있다면 완벽한 남부 보헤미아에서의 하루입니다.
아쉽게 놓친 꼴레뇨 만찬
딱 한번의 밤이 허락됐습니다. 태양은 다시 볼 수 있지만 밤은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이 밤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좁은 골목길에 있는 식당은 크고 두터운 나무 문으로 닫혀 있어 선뜻 열고 들어가기 망설여지는데요, 체코식 족발 요리인 꼴레뇨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합니다. 양손으로 문고리를 쥐고 힘껏 당기니 그야말로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장에 있는 느낌입니다. 어둑한 조명으로 겨우 밝힌 실내는 동굴처럼 돌로 지어진 형태가 낯설지만 아늑한 느낌이 듭니다. 왠지 구석 테이블에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줄무늬 바지를 입은 바이킹이 커다란 은잔에 술을 채워 마시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호기롭게 들어섰지만 아쉽게도 이 식당의 꼴레뇨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만큼 인기가 많았습니다.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세시간쯤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지금은 세시간 후에라도 꼭 가볼 것을, 하고 후회합니다. 발걸음을 돌리며 나는 순간 눈에 띈 꼴레뇨 익어가는 풍경과 식당 곳곳의 운치가 다시 없을만큼 특별했거든요.
그렇게 식당에서 나와 걷다보니 어느새 다시 스보르노스티 광장, 이제 막 저녁 일곱시가 넘었지만 도시는 이미 이른 잠에 빠졌습니다. 상점과 레스토랑은 문을 닫은 지 오래, 중세 유럽 정취에 빠져 돌아가는 것을 잃은 사람들을 맞이하는 호텔만 붉은 조명을 밝혔습니다. 광장 한복판에 서니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그래도 덕분에 지금 이 광장을 혼자 차지하게 됐네'
그새 보헤미안의 말투를 배웠나 봅니다.
- 스보르노스티 광장 (Námestí Svornos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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