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지난 겨울 프라하 여행에서 어느 순간이 가장 즐거웠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한참을 생각하고 결국은 대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가장 '빛나는' 순간을 묻는 질문에는 주저하지 않고 답할 수 있습니다. 프라하에서 맞은 가장 화려하고 감동적인 아침, 첫 여행에선 미지의 땅이었던 블타바 강 건너 북쪽의 레트나 공원 전망대의 풍경이 그랬습니다. 대표적인 전망대인 페트르진 언덕 위에서 본 프라하의 웅장함에 또 다른 매력으로 견줄 수 있는 곳. 상대적으로 한국 관광객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이렇게 소개하려 합니다.



사실 이 곳의 이름은 지난 첫번째 여행에서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프라하의 전경을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장소를 추천받다 알게 된 곳인데 아쉽게도 부족한 시간 때문에 그냥 돌아와야 했죠. 그렇다고 이번 여행에서 이 곳을 꼭 방문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년 전 메모해 둔 이 이름이 마침 그날 새벽녘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미지의 땅이 됐을 것입니다.


사실 이 레트나 공원은 프라하 구시가 - 프라하 성 지구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관광 루트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볼 수 있듯 공원의 규모가 굉장히 큰지라 주변에 별다른 관광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정이 촉박한 여행에선 외면하게 되는 것 같아요. 다행히 저는 지난 여행 숙소가 레트나 공원에서 가까운 요세포프(Josevov) 지역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척 큰 행운이었다 생각합니다.



프라하의 겨울, AM 5:30



여행으로 적기가 아니라는 프라하의 겨울, 도시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던 4월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도시 특유의 풍부한 감성이 겨울이라고 쉬 잠들거나 시들지는 않습니다. 중세 유럽의 건축물은 계절과 상관없이 멋지고 쌀쌀한 공기가 이른 새벽부터 쭈뼛쭈뼛 여행의 설렘을 더합니다. 프라하의 겨울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아 좋았습니다. 떠나온 서울과 비슷한 기온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시각. 그래서 지난 여행은 그리 멀리 왔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두번째 여행이라 그런 것일수도 있겠죠.


시차 때문인지 아침이면 늘 해가 뜨기 전에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한 여행 초반이었죠. 그래서 여섯시가 채 되기도 전에 텅 빈 요세포프의 골목길로 나섰습니다. 이제 막 여명이 물드는 것이 제가 보지 못한 이 도시의 매력같아 가슴이 설레면서도 이러다 곧 해가 떠올라 버릴까봐 마음이 급해졌어요. 뭐 여행이 늘 그렇지만 여러 감정으로 복잡했습니다. 물론 그 중 안좋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새벽녘 여명으로 붉게 물든 블타바는 빛나던 봄과는 또 다른 매력입니다. 커다랗고 고요한 거울이 강 아래 깔린 느낌인데,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서인지 문득 이 강이 이렇게 좁았나 하며 아쉬워했습니다. 나중에 확인하니 실제로 카렐교가 뻗은 곳보다 강 폭이 좁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만, 그 날 제 눈썰미가 그렇게 좋았던 것 같진 않습니다. 그냥 이 체후프(Čechův)다리를 건너며 감상에 푹 빠진 것 같아요.




강을 건너는 제 오른쪽은 아직 실루엣뿐인 새벽이지만 왼쪽은 벌써 아침이 꽤 내렸습니다. 저멀리 프라하 성, 정확히 말하면 성 비타 대성당의 위용있는 첨탑도 보이고요. 2월의 프라하는 공기는 아직 쌀쌀하지만 어느덧 도시 곳곳이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요한 강의 물결이 그랬고 아침이 반복될수록 점점 색이 짙어지는 도시 풍경이 그랬습니다. 이 날은 지난 여행 중 가장 화창한 하루였지만 블타바는 여행 마지막까지 꾸준히 아름다웠습니다.




다리 위 아무것도 없다고 안심하며 작은 일탈을 꿈꾸던 제게 새벽녘 트램은 정신이 번쩍 들만큼 커다란 경적을 질렀습니다. 깜짝 놀라 인도 위에 껑충 올라선 제 어깨로 빨간 클래식 트램이 휙 지나가는데 유리창 너머 햇살이 트램을 가득 채우고 급기야 제 눈으로 쏟아져 내리는 풍경이 순간 -이런 표현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황홀했달까요? 새빨갛게 물든 블타바와 레트나 전망대 위에서 본 프라하의 아침 못지 않게 이 트램이 지나가는 순간의 강렬함이 제겐 지난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남아 있습니다.




레트나 공원, 전망대는 생각보다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합니다. 뭐 그러니까 도시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이겠죠. '이른 새벽부터 이건 좀 무리잖아' 라고 생각 했지만 이내 묵묵히 계단을 올라갑니다. 혹 좀 더 올라가면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봐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끝까지 올랐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휴지통이며 돌, 계단 곳곳에 붙어 있었던 익살스러운 사람 모양의 스티커입니다. 제게 프라하는 '옛날 그대로의 도시'였는데 이 재미있는 형태를 보며 새삼 여전히 살아 숨쉬고 변화하는 도시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 사진이 흔들린 이유는 설렘일까요 차오른 숨일까요 -



첨탑의 도시가 만드는 아침 실루엣



다행히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에 꽤 높은 곳까지 올랐습니다. 정확히 그녀가 말한 '레트나 전망대'가 어디쯤인지는 알 수 없어도 분명 구글맵은 이 곳이 레트나 공원이라 했고 실제 올라와보니 보이는 풍경이 꽤 보기 좋았습니다. 아직은 실루엣으로 펼쳐진 도시, 문득 가운데 솟은 두 개의 첨탑이 구시가 광장의 틴 성당이라 말하는 제 모습이 무척 뿌듯했습니다. 곳곳이 현대화되었고 사람들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다니지만 프라하는 아직 곳곳에서 중세 유럽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아침 실루엣에 솟은 수많은 첨탑이 가장 잘 설명합니다.


새벽녘 도시의 실루엣을 보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침의 색은 크게 다를것이 없지만 건축물이 만드는 실루엣은 분명 그 도시만의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울 모스크바의 늦은 아침 실루엣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요. 체코 프라하의 실루엣은 이 날 아침 레트나 전망대에서 본 이 첨탑들의 하모니로 기억될 것입니다. 프라하 성은 없지만 이것으로도 프라하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조금씩 해가 밝아오며 걷혔던 도시의 형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짧은 환상 여행을 선사한 블타바 강과 체후프 다리도 벌써 저만큼 멀어졌습니다. 무심히 지나쳐 온 강 주변의 건물들이 문득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라는 것에 감동하며 풍경이 완전히 밝아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가끔 '와아-'하고 탄성이나 질렀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걸어온 길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됩니다. 저 멀리 캄파 섬까지 길게 뻗은 블타바 강의 곡손 그리고 카렐 다리와 마네수프 다리의 실루엣을 한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주변의 알록달록한 중세유럽 건물들은 덤입니다. 저 멀리 카렐교 끝자락에 있는 전망대는 지난 여행 가장 마지막으로 오른 곳입니다. 아쉽게도 종일 비가 와서 그림같은 풍경은 아녔지만 말예요. 덕분에 그 때 저와 약속을 했습니다. 꼭 다시 돌아와 눈부신 날씨로 이 장면을 한번 더 보겠다고. 차가 많지 않은 시각이라 도시 전체는 고요합니다. 분주히 하지만 이 도시를 벗어나지 않고 날아다니는 새들의 지저귐 정도만 들려 운치 충만한 시간이었습니다.




한바탕 새벽 황홀경을 감상했으니 이제 배가 고파질 때까지 이 큰 공원 일부를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꽤 높은 언덕 위에 조성된 레트나 공원은 용산 가족공원 못지 않은 대규모였고 이른 아침이라 조깅과 산책을 즐기는 몇몇 현지인을 제외하면 무척 한가했습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오늘 아침의 남은 여명이 아낌없이 쏟아지는 풍경이 또한번 발목을 잡습니다.





아, 이곳이구나.



아마도 밤새 이야기를 나눴을듯한 두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이 곳이 지난해 그녀가 말했던 그 레트나 전망대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추운 날씨에 이따금 입김이 두 사람 사이로 솟아 오르는데 그 뒤로 펼쳐진 풍경 때문에 저도 추위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침은 더 아래까지 내려앉았고 도시의 주황색 지붕은 이제야 제 색을 찾은듯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마네수프 다리며 카렐 다리, 블타바 강의 풍경 역시 이 곳에서 더 한가득 펼쳐진 것이 몇십분 전 해가 떠오르기 전 이 곳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했죠.


그래서 저 역시 이 공원을 둘러보려 했던 계획을 취소하고 이 난간에 기대 한참동안 프라하의 아침을 더 감상했습니다.

이 날 보았던 풍경, 코 끝에 닿던 공기의 온도, 짧게 나눈 대화와 사진을 찍으려 취했던 포즈까지 모두 특별했던 것은 이 장소가 만들어준 풍부한 감정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 생소한 곳을 많은 분들에게 이야기하고 또 사진을 보이며 소개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르던 프라하가 이 곳에 또 하나 있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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