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출시됐으니 십 년이 됐습니다. 후속인 GR3가 2019년, 그리고 올해 가을에 GR4가 나온다고 하니 카메라로서의 수명은 끝나간다고 봐도 무리가 아닙니다. 당시에도 빠릿빠릿한 카메라가 아니었으니 지금 쓰려면 답답해서 속이 터질지도 몰라요. 초점이 맞지 않거나 노이즈가 심한 사진들은 종종 아이폰으로 촬영한 것보다도 못나 보입니다. 하지만 GR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여전히 시장에서 GR2가 큰 인기를 누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저도 출국 전 이 카메라를 구매하기 위해 며칠간 여러 게시판을 드나들어야 했습니다.
석 달간의 여행 내내 재킷 주머니 안에 GR2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목에 컨 크고 무거운 카메라가 고장 났을 때를 대비할 용도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GR2로 찍은 사진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늘 곁에 두게 되는 그리고 어디서든 꺼낼 수 있는 카메라라야 잡을 수 있는 기회들이 있거든요. 그 기록들은 투박하지만 그 때의 빛과 속도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와서 GR2를 추천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이런 용도, 방식으로 즐기기엔 여전히 나쁘지 않다, 정도죠.
제품 사양
1690만 화소 23.7 x 15.7mm CMO 이미지 센서 (APS-C)
18.3mm F2.8 GR 렌즈 (5군 7매, 비구면 렌즈 2매 포함)
1/4000-300초
ISO 100-25600
20cm 근접 촬영
1920x1080 30fps 동영상 촬영
3인치 23만 도트 LCD 모니터
DB-65 배터리 | 320매 촬영 가능
Wi-Fi 무선 통신 지원
117x62.8x34.7mm
251g (배터리 포함)
APS-C 포맷 이미지 센서와 35mm 환산 28mm F2.8 렌즈를 탑재한 작은 카메라. 풀어서 설명하면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작은 카메라로 DSLR/미러리스급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GR 시리즈의 정체성입니다. 이외엔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어도 십 년 넘게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비결이고요.
휴대성과 이미지 품질. 이 둘을 모두 갖춘 GR 시리즈를 많은 사람들이 여행 또는 일상의 기록용으로 사용합니다. APS-C 포맷 이미지 센터를 탑재한 다른 카메라들과 비교해도 휴대성은 발군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후지필름 X100 시리즈도 작은 편에 속하지만 전체 부피는 꽤나 차이 납니다. 제 목적이었던 여행용 서브 카메라로서는 GR 시리즈가 훨씬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발전이 더뎌도 너무 더딥니다. GR과 GR2는 무선 통신을 제외하면 거의 동일한 사양이고 GR3과 비교해도 드라마틱한 차이는 나지 않아요.
GR3는 크기가 조금 더 작아졌습니다. 화소수가 1600만에서 2400만으로 1.5배 증가했고 AF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더 높은 ISO 감도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화면 터치가 되니 조작하기가 전보다 편하고요. 하지만 이것 때문에 GR2를 쓰다 GR3를 살 것이냐고 물으면 굳이, 라고 할 것 같습니다. 메인 카메라라면 높은 화소가 탐나겠지만 가벼운 서브 카메라로 쓰기에는 1600만 화소도 충분합니다. AF가 빨라졌다고 해도 요즘 미러리스 카메라나 아이폰처럼 빠릿할 리 없으니 기대가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고감도 이미지 품질 기대하며 쓰는 카메라도 아니고요. 그건 GR4가 나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어떤 버전이든 GR의 매력은 충분히 누릴 수 있다고 하면 위안이 될까요?
휴대성
저는 GR 시리즈의 독보적인 휴대성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줍니다. APS-C 포맷 이미지 센서와 밝은 단렌즈를 탑재한 카메라 중 재킷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몇 안되는 모델이라는 점이 구매의 가장 큰 이유였어요. 장기간의 여행에서 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카메라도 휴대성 위주로 봐야 했는데 그렇다고 화질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메인 카메라는 라이카 Q2가 됐고 서브 카메라로 GR을 추가했어요. 두 카메라는 공통점이 제법 많습니다. 동일 카테고리에서 휴대성이 가장 좋은 시리즈라는 것 그리고 28mm 렌즈를 탑재했다는 것 등.
무게가 250g에 불과한 이 카메라는 매일 가지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었습니다. 크기가 작아서 가방이 필요 없는 것도 좋았어요. 재킷 주머니에 넣어 뒀다가 필요할 때 잠깐 꺼내 찍고 다시 넣으면 끝. 큰 카메라가 부담스러운 식당이나 카페, 미술관, 기차, 버스에서 촬영하기에도 좋았어요. 조금 더 욕심을 내서 X100 시리즈를 챙겼다면 Q2와 용도가 겹쳤을 겁니다. 둘 중 하나는 숙소에 두고 다닌 날이 많았을 테고요.
출국 전날 급하게 GR2 중고를 샀던 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서브 카메라로 이만한 카메라가 없더군요. 중요한 장면들은 풀프레임 카메라인 Q2로 기록했고 그 사이 사이의 소소한 기록들을 GR2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결과물은 기대를 늘 상회했습니다.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긴 했습니다만.
Q2의 결과물이 본편이라면 GR2로 담은 장면들은 비하인드 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 주변으로는 어떤 풍경들이 펼쳐졌는지, 어떤 자세로 서 있었고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뭐 그런 것들요. 그래서 넘겨보는 재미가 더 커요. 때때로 본편보다 비하인드 신이 더 재미있을 때가 있잖아요. 카메라에 애착이 생길 수밖에 없고요. 게다가 지금도 서브 카메라로 이만한 가성비가 없습니다. GR3가 낫지 않냐고요? 근데 그건 배로 비싸잖아요. 별반 차이도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