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닷새 간의 일정으로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벚꽃이 한창일 때였고, 오후엔 땀이 살짝 배어나올 만큼 날씨도 무르익어서 시간이 금방 지나갔어요. 서울에 올라온 날부터 부산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방역 단계도 한 단계 더 상승했으니 더 늦기 전에 잘 다녀온 것 같습니다. 다녀와 사진을 한 장 한 장 정리하면서 맘에 든 사진들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라이카 M10-D와는 처음으로 함께 한 여행이었습니다. 처음 이 카메라를 선택했을 때 궁금했던 화면 없는 디지털 카메라의 불편함 그리고 매력들을 하나씩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앞으로 차근차근 풀어볼 계획입니다. 아직까지는 불편한 게 참 많지만, 그 속의 묘한 즐거움 그리고 다음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있더라고요.
바다, 바다
도시에서 태어난 제가 대도시 부산에 가는 이유는 당연히 바다입니다. 사는 곳과 다른 풍경을 느끼고 싶었다면 조금 더 깊고 낯선 소도시로 찾아갔겠죠. 바다가 보고 싶었고, 간간히 찾는 부산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숙소를 늘 해운대 근처에 잡는 이유 역시 바다였습니다. KTX 역에서 곧장 달려간 해운대 바닷가. 코로나 때문인지 해변의 분위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수영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 때마침 11년만에 황사와 미세먼지가 가장 심한 날이어서 시야가 혼통 노란색이라 더 답답한 느낌이었어요. 외출이 힘들었던 여행 첫 날, 그래도 오랜만에 바다에 왔으니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M10-D는 화면이 없어 라이브 뷰 촬영이 불가능하니 아예 노파인더샷을 즐기게 됩니다. 이 사진은 21mm F3.5 컬러 스코파 렌즈로 카메라를 바닥 가까이 낮춰 촬영했는데 맘에 드는 사진이 됐어요. 대기의 노란 먼지 때문에 흑백 변환이 더 나은 결과가 됐습니다.
짧은 계절
요즘 사람들에게는 봄 속에 또 하나의 계절이 있는 것 같아요. 벚꽃 시즌. 일년에 이 주 남짓 될까요, 그 짧은 계절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부산도 곳곳이 북새통을 이뤘습니다. 다녀보면 이렇게 곳곳에 벚나무가 많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죠. 그리고 일년에 보름이 안 되는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이 나무를 심은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달맞이, 센텀시티, 영도 등에서 2021년의 벚꽃 추억을 기록했습니다. 그 중 옛 부산역 뒷편에 홀로 피어있던 벚나무와 센텀시티 공원에서 마주친 벚꽃길 자전거 풍경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제 또 이 짧은 계절을 일 년 기다려야겠네요. 그 때는 무엇이 바뀌어 있을까요?
해운대
숙소가 바다 가까이 있어 좋은 것은 아침, 낮, 저녁, 밤 언제든 원할 때 파도소리를 듣고 바닷가를 산책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황사와 미세먼지로 실망만 안겼던 첫 날이 지나고 날씨는 몰라보게 화창해졌습니다. 반가움에 해운대 바닷가를 따라 산책을 하고, 달맞이 공원에 올랐습니다. 여행에 오면 날씨같은 사소한 것에 감사하게 되죠.
부산에 올 때마다 특히 해운대 주변 풍경은 크게 바뀌어 있습니다. 이번엔 엘시티가 그 놀라움의 대상이었죠. 개인적으로는 해운대 주변의 고층 빌딩들이 제가 기대하고 좋아했던 바닷가 풍경을 상당부분 가리고 훼방 놓아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바닷가 바로 앞에 조성된 번화가 풍경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게 여전히 이질적이고 재미있습니다. 그래도 이 날 느낀 여유는 다음에 와도 그대로이길 바랍니다.
카페 대신 찻집, 커피 대신 식혜
달맞이 고개에 올랐던 날, 아마 그 오후가 가장 날이 따가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3월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은데 남쪽 지방은 역시 서울보다 계절이 빠르다는 걸 실감했죠. 청사포 해안에서 달맞이 고개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점퍼 안 티셔츠가 흠뻑 젖었습니다. 땀을 식히고 갈증 해소도 할 겸 찾은 곳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통 찻집. 메뉴는 단호박 빙수와 단호박 식혜였습니다.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에 익숙했던 그간의 입맛과 선택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이날의 디저트와 음료 맛은 기가 막혔습니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마신 달짝지근한 단호박 식혜와 등이 오싹해지도록 차가웠던 단호박 빙수의 맛이 '봄'하면 생각나는 것들로 새롭게 추가됐어요. 이곳은 비비비당이라는 곳인데, 조만간 블로그에 소개하려고요.
오륙도
헛헛했던 20대의 어느 해, 몇 번의 계절동안 저는 홀로 동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는 것을 즐겼습니다. 가장 긴 노선의 버스를 타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즐기는 여유가 참 달콤했죠. 그 때 늘 했던 상상이 '종점에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였습니다. 그런데 부산에는 있더라고요. 부산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정도 가니 오륙도 해상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바다를 따라 뻗은 공원에는 수선화와 유채가 가득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친구/연인들이 공원을 가득 메워 추억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매서운 바람에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왔지만 아름다운 해안선과 섬, 꽃밭 등이 계속 발길을 붙잡았던 곳. 다음엔 해맞이부터 해넘이까지 하루를 보내고 오고 싶어요.
광안리 1인 사무소
가게 이름이 참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1인 운영되는 카페였고요. 여긴 출발 전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곳인데 캐릭터 모양을 한 디저트가 눈길을 사로 잡아서 꼭 가고 싶었어요. 마침 위치도 광안리 근처였고요. 들어서는 순간 실내에 가득한 장난감과 피규어, 캐릭터 상품들이 주인의 취향과 시간, 노력을 느끼게 했습니다. 공간이 그 사람을 가장 잘 표현한다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죠. 시즌마다 바뀐다는 이날의 디저트는 어릴 적 봤던 만화 스머프의 주인공들. 먹기보다 사진찍기 더 좋은 이곳에서 언젠가 내가 이런 공간을 꾸민다면 찾는 이들에게 어떤 느낌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된 여행책
보수동 헌책방 골목 어느 책방에서 만난 여행서. 일부러 가지 않으면 찾기 힘든 구석 책꽂이에 나란히 비슷한 책이 있어 보았더니 1987년에 출간된 세계 여행 서적이었습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 대륙별로 엮은 책은 그 한권이 백과사전만큼 두꺼웠어요. 책장을 넘겨보니 세로로 쓴 글자들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어가는 페이지 구성까지 아주 클래식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당시 소련의 모스크바 여행에 대한 내용을 발견했어요. 모스크바 여행 에세이를 출간한 제게는 매우 흥미로워서 많지 않은 모스크바 여행 페이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헌책방에서의 소중한 인연 그리고 발견이었습니다.
골든 아워
때로는 수십 분의 노을이 몇 달의 여행보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따가웠던 오후가 저물던 시간, 해운대는 멋들어진 황금 빛으로 물들었고 저는 평소답지 않게 해변 곳곳을 종종걸음으로 뛰어 다니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해변과 사람의 실루엣이 남미 어느 도시 같다는 말을 하면서요. 이 사진은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한 장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 한 장으로 2021년 봄을 두고두고 얘기하게 될 것 같아요. 나, 우리의 골든 아워였다고 하면서요.
60초
부산에 오면 빠짐없이 거치는 시간이 늦은 밤 동백섬 한 바퀴를 도는 야간 산책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더 베이 101을 출발해 해운대 바닷가까지 동백섬을 한 바퀴 돌았고, 매번 멈춰 서는 전망대에서 늘 그렇듯 밤바다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셔터가 열려있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들을 흘려 보내고 파도 소리가 쉴 새 없이 그것을 훔쳐가는 60초가 너무나 평온하고 즐거워서 매 여행마다 반복하는 거겠죠.
여행은 새로운 것과 익숙한 것으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부산 여행을 올 때면 그리웠던 익숙함을 하루에 한,두개씩 놓아 두고 그 사이에 새로운 것들을 끼워 넣어 그 해 추억을 남깁니다. 동백섬 밤 산책은 그 익숙한 것들 중 늘 마지막이고, 해운대 바닷가로 돌아오면 무언가 이번 여행의 미션을 다 달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죠.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것도 좋은 여행의 방법이 아닐까, 부산에선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여기까지가 부산에서 담은 베스트 컷들입니다. 화면 없는 카메라와 함께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마치 필름 카메라를 들고 여행하는 것처럼 카메라 속 장면들을 상상하고 기대하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물론 장노출 촬영이나 라이브 뷰 촬영이 필요할 때는 몹시도 불편했지만요. 덕분에 다른 때보다 여행에 더 집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때문이 아니라 2021년 봄이, 그 계절의 부산이 그 자체로 이전보다 아름다웠던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