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보고 가요,
그러려고 왔어요.
요즘들어 긴 여행보단 짧은 나들이를 즐기고 있습니다. 초여름이었던가, 아침에 일어나 문득 바다가 생각나 강릉으로 달려간 것을 시작으로 제주와 남해, 인천 등 짧게는 반나절, 길게는 이삼일간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다 돌아오는 식입니다. 그 중에서도 강원도가 새로운 풍경과 여유로움이 있어 즐겨 찾는 곳이 되었죠. 바다가 있고, 바다도 있고, 또 바다까지 있으니까요.
얼마 전엔 가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웠던지, 겨울이 이만큼 다가온 것이 반가웠던지 아침에 속초행 버스를 탔습니다. 강릉은 이제 제법 편한 곳이 됐지만 속초는 마음 먹고 가 본 적이 없어 강릉과 멀지 않은 곳임에도 기대가 되더군요. 함께 고민했던 양양은 다음을 기약하면서.
그렇게 세 시간쯤 뒤에 속초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작은 터미널과 좁은 골목길. 게다가 지도를 보니 속초 해수욕장이 지척에 있더군요.
고민없이 바로 바다로 향했습니다. 걷다보니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바다 앞 버스 정류장
- 이 날도 역시 올림푸스 PEN-F, 17mm F1.8 렌즈와 함께 -
모래와 물 빼고는 딱히 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초겨울 바다에는 금세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만큼 적은 사람들 몇 명만이 앉고 걷고 또 뛰며 소중한 하루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이것저것 짧은 시간이나마 속초에서 해 볼 것을 찾았지만 막상 해변에 오니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가 짧은 계절, 시계는 점심 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삼십 분을 가만히 파도 소리 듣다가 해변을 빠져 나왔습니다.
바다와 맞닿은 호수
강릉의 경포호를 참 좋아합니다. 바다와 맞닿다시피 한 커다란 호수가 도시의 여유, 낭만을 잘 보여주거든요. 그 주변으로 모인 사람들, 새것과 오래된 것들의 조화들도 근사합니다. 그것이 강릉만의 운치라고 생각했는데 속초에도 그 못지 않은 호수가 있더군요. 반가운 맘에 지도를 찾아 보니 동해안에 이런 호수들이 참 많습니다. 새삼 얼마나 제 시야가 좁았나 돌아봅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나오는 청초호는 바다처럼 깊고 짙은 파랑색이었습니다. 주변 풍경도 마치 포구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바닷가를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잘 조성된 근린 공원과 산책 나온 사람들의 가벼운 옷차림에선 여느 호수공원 같은 느낌이 들었고요. 산책이 주 목적이어서 첫 번째 목적지였던 카페까지 호숫가를 따라 쭉 걸었습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전망대, 팔각정 형태의 전망대에서는 간간히 시민들이 쉬었다 가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 멀리 교각과 배를 보니 영락없이 바다 같습니다만, 이곳은 분명히 호수입니다. 파도 없이 잔잔한 물이 아니었으면 착각하고 바다 찾아 가는 것을 잊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버스에서 검색한 이 날 첫 목적지가 호숫가에 있었습니다. 이름을 통해 유추하건대 그 언젠가 속초,양양에 들고 나는 배들을 정비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바다가 아니라 호수에 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만. 지금은 실내를 개조해 카페로 운영중이라고 해서 찾아가 보았습니다.
개조했다지만 사실 '어디를?'이라고 물을 정도로 캠퍼스 내부는 그 언젠가의 조선소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차를 주문하고 앉아 마시는 작은 건물 하나를 빼면 별 다르게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칠성조선소 살롱에 대한 포스팅은 이전에 남겨놓은 것이 있습니다. 속초 청초호를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입니다.
호수가 보이는 독특한 카페, 속초 칠성조선소 살롱 (올림푸스 PEN-F & 17mm F1.8)
일부러 커피를 들고 밖에 나와 호수가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누릴 수 없는 이곳만의 여유와 운치니까요.
커피가 특별하진 않았습니다만 속초 해수욕장에서 카페까지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온 수고를 달래고, 쌀쌀해 진 바람에 언 손과 속을 녹일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닷가 풍경들
해변과 카페에서 여유를 부리다 보니 어느새 오후도 중반. 이러다 곧 해가 지겠다 싶어 또 다른 바다를 찾아 갔습니다. 바다가 지천에 펼쳐진 속초지만 가고 싶던 곳은 걸어 가기엔 제법 멀어서 버스를 탔습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내리니 역시 바다가 보입니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 보인 생선 말리는 풍경에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 이런 풍경을 기대하고 왔지, 라면서.
속초의 동명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가슴 탁 트이는 풍경이 보고 싶었거든요. 전망대는 오르기 그리 어렵지 않고 노력 대비 뷰도 좋아서 왼쪽으로는 바다, 오른쪽으로는 항구 풍경이 시야에 가득 차는 것이 퍽 만족스러웠습니다. 늦은 오후의 항구에는 조금씩 주황색 빛이 들고 있었습니다. 다만 너무 강렬해서 실눈을 뜨고 봐야 했어요.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항구 옆으로 보이는 영금정. 익숙하다 싶어 생각해 봤더니 이,삼 년 전 왔던 곳이더군요. 그 때는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고성과 양양, 속초의 몇몇 장소를 다니느라 속초인지도 몰랐습니다. 오랜만에, 하지만 우연히 재회한 풍경은 유난히 반갑습니다.
낮과 밤의 경계
전망대를 내려와 영금정으로 향했습니다. 길게 뻗은 돌길 끝에 팔각정 전망대가 있는 속초 바다의 대표적인 풍경 중 한 곳입니다. 익히 알려진 곳이라 그런지 평일 오후에도 삼삼오오 찾은 관광객들이 많았습니다. 때마침 날씨가 무척 좋아서 하늘과 바다의 파랑을 배경으로 풍경을 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세차게 바위와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지만, 이 날 바다는 짙고 잔잔했습니다. 멀리서 보니 마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을 정도로.
시야를 가득 채운 파랑은 바다가 그리워 온 찾아온 이의 갈증을 채우기에 충분했습니다.
2년 만의 산책
영금정의 야경이 펼쳐질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동명항 부두길을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2년 전 그 날이 생각났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우비를 입고 걸어야 했죠. 계절도 날씨도 다르지만 걷다 보니 자연스레 그 날이 떠오른 걸 보면 장소가 주는 힘이 생각보다 큰 것 같습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그 날 텅 비었던 부두가에는 시장이 열리고 식당들의 손님 끄는 목소리가 시끌벅적했습니다.
동명항 부두길은 생각보다 길었습니다. 그리 여유를 부리지 않고 걸었는데도 왕복하는 데 한 시간 가까이 걸렸던 것 같습니다. 일몰 때까지 가볍게 좀 걷다 오자 싶었던 저는 어느새 능선에 반쯤 가려진 해를 보며 걸음을 재촉해야 했죠. 원래 그랬겠습니다만, 요즘은 겨울해가 유독 더 짧게 느껴집니다. 하루짜리 나들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죠.
그래도 동명항 부두길에서 본 일몰이 이 날의 찍은 장면들 중 가장 환하고 근사했습니다. 비 오는 날 여름날 못 이룬 꿈을 이 년이 지난 겨울날에 해소하고 왔어요.
문득 궁금한 것이 비슷한 시간, 같은 배경인데도 계절마다 일몰의 분위기, 색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였습니다. 대기의 차이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진을 찍은 순간의 바람과 냄새 때문일까요. 이 날 일몰의 색은 따뜻했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느낌이 있습니다.
속초의 밤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시작된 일몰이 여섯시쯤 되자 바다와 하늘의 색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습니다. 덕분에 영금정을 밝힌 조명들이 더욱 돋보였고요.
잠시 하룻밤 속초에서 묵을까 생각했지만, 일기 예보를 보니 밤부터 비가 온다더군요.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고 영금정의 야경으로 짧은 나들이를 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30초, 40초, 길게는 60초. 셔터가 닫히길 기다리며 이런 저런 생각하는 시간을 저는 종종 낚시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래서 야경 촬영을 여행마다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쌀쌀한 공기와 바람에 사람은 없지만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환하게 불을 밝힌 속초의 밤을 겨우 빠져 나왔습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빵과 우유로 배를 채우지만 카메라 안에 하루의 기록들이 있어 든든했습니다.
곧장 다음 나들이를 떠날 수 있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아마 당분간은 이렇게 짧은 여행의 매력에 빠져 지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