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늦기 전에 봄나들이를 다녀와야겠다 싶어 '내일 당장' '강릉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것은 밤 늦은 시각이었습니다. 때마침 연락이 온 친구에게 경포호의 벚꽃 이야기를 하니 따라 나서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남자 둘이 아침 일찍 KTX를 타고 강릉으로 떠났습니다. 서울역에서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강릉에 도착했고, 택시 기사님의 강릉 소개를 들으며 경포호에 도착했습니다.
축제를 며칠 앞둔 평일이라 그런지 주차장 몇 백 미터 앞부터 차가 막히더군요. 창 밖 가득한 벚나무에서 쉴 새 없이 꽃잎이 떨어지는 걸 앉아서 보고만 있자니 엉덩이가 들썩거려 결국 못 참고 택시에서 내렸습니다. 가시연 습지공원부터 경포호로 이어지는 긴 산책로는 물론 길 건너까지 강릉의 모든 나무가 벚나무인것 마냥 연분홍 풍경이 가득했습니다. 경포호 입구쯤 다다르니 축제를 알리는 문구 '일주일의 벚꽃엔딩'이 눈에 띄더군요. 때마침 날씨도 화창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비싼 기차 타고 온 보람을 느꼈습니다.
미세먼지다 뭐다 해서 잊고 살기 쉽지만, 봄은 사진찍기 좋은 계절입니다. 꽃과 풀이, 하늘과 강, 바다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그동안 쓰던 PEN-F보다 좀 더 좋은 E-M1 Mark II로 바꿔 들어 나들이를 왔습니다. 사진과 함께 영상으로도 2019년 봄날의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요. 포스팅의 모든 사진은 이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더 만개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날도 올림픽 경기장 어귀부터 경포호까지 꽤나 긴 구간이 온통 벚나무로 가득해서 봄나들이 기분이 대단했죠. 평일 오후라 가시연 습지공원에서 경포호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한적해서 몇 걸음에 한 장씩 사진을 찍고, 멈춰 서 빙글 돌며 동영상도 찍었습니다. 이따금씩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커플들이 이날만큼은 부럽지 않았습니다.
경포호의 벚꽃 풍경
벚꽃 시즌에 경포를 찾은 것은 10여년 만입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커다란 호수, 그리고 굵고 투박한 붓으로 그린듯 호수를 빙 둘러 가득 핀 벚나무. 낭만이란 건 도통 모르던 그 시절에도 그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 밤이 까맣게 깊을 때까지 떠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잊지 못하고 봄이면 생각이 났고요. 그 기억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십 년만에 찾은 경포호의 봄풍경은 여전히 근사했습니다.
축제를 며칠 앞두고 찾은 것도 좋은 선택이었고요. 축제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풍경 사이를 여유롭게 걷고 있으니 특별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서울은 매일 미세먼지 고민을 해야 한다지만 이만큼 도망 오니 '그래 봄 하늘이 이랬었지'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하늘이 파랬습니다. 함께 온 친구가 아니었으면 이날도 밤이 될 때까지 몇 바퀴고 호수를 빙빙 돌았을지 모르겠어요.
십 년 전과 달리 이날은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느새 봄마다 찾게 된 강릉의 이곳 저곳에 인사를 하고 싶기도 했고요. 오랜만에 구경하는 벚꽃 좀 눈에 담고 얼른 떠나자고 한 게 금방 두어 시간이 지났습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시간이 어디서나 똑같이 흐르는 게 아닐 수도 있겠어요.
경포호 옆에 있는 초당 순두부 마을에 들러 순두부 젤라또를 먹었습니다. 기차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오는 바람에 순두부 정식 대신 선택한 건데요,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습니다. 두유 향이 진하게 나면서 젤라또의 식감까지 더해지니 디저트로 그만이더군요. 아마도 전 세계에 순두부 젤라또를 파는 곳은 이곳뿐이니 강릉에 오시면 꼭 드셔보세요.
투명에 가까운 블루, 강문 해변
경포와 강문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해변이기도 합니다. 같은 바닷물이고, 백사장과 길로 이어져 있으니 사실 같은 해변이지만 그냥 이곳이 좋습니다. 밤이면 화려하게 빛나는 솟대 다리도, 이제 주인 없이 서 있는 낡은 등대가 좋아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혼자 강문에 왔는데, 이 날은 친구와 온 김에 도시락도 싸고, 무려 물장구도 쳤습니다.
4월의 바닷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그래도 '역시 동해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이 맑아서 고민 끝에 신발과 양말을 벗어 던진 것이 후회되지 않았어요. 지난 가을 제주에서 맨발로 중문 백사장을 걸었던 것이 마지막이니 얼추 반 년만입니다. 벗은 김에 노란 등대까지 꽤 먼 거리를 맨발로 걸었는데, 모래 때문에 발은 좀 따가워도 기분은 최고였습니다.
간식거리를 찾는 친구와 함께 발견한 진또배기 바게트버거. 마을 이름을 딴 것인데, 메뉴는 강원도와도, 진또배기 마을과도 상관이 없는 빵이라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바게트 속을 파서 고기와 채소를 채운 것인데, 일전에 여수에서 먹었던 바게트 버거보다 빵이 바삭하고 고기가 많아서 저는 아주 만족했습니다. 강문 해변 근처에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드셔 보셔도 좋겠어요. 가격은 5000원으로 제 생각엔 조금 비싼 편입니다.
#카페투어
남자끼리지만 함께 간 친구와는 종종 카페 투어를 다니는 사이입니다. 제주에서도 카페를 전전하며 커피만 연거푸 석 잔을 마신 날도 있었지요. 벚꽃도 바다도 다 보고 나니 이제 좀 쉬자 싶어 근처에 있는 테라로사로 향했습니다. 사실 강릉 테라로사 커피공장에 가 보고 싶었는데 거리가 멀더군요. 커피로 유명한 강릉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이곳과 박이추 보헤미안 커피였는데, 시간 관계상 보헤미안은 다음 나들이로 미뤘습니다.
봄 시즌을 맞아 나온 벚꽃 블렌드를 홀짝이며 잠시나마 여유를 즐겼습니다. 촌놈이라 커피 맛은 잘 모르지만 카페의 분위기, 여행 사이의 여유, 함께 먹는 초콜릿 케이크같은 것들 모두 커피 즐기는 방법 아니겠어요. 유달리 빨리 시간이 흐른 날, 카페 창 밖 풍경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나섰습니다.
안목 해변, 밤바다
돌아가기 전 다시 강문에 가서 밤바다를 볼까 하다가, 짧은 당일 나들이에 같은 곳을 두 번 가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카페로 유명한 안목 해변으로 갔습니다. 친구가 전부터 안목 해변을 궁금해하기도 했고요. 아쉽게도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안목 해변에 늘어선 카페를 구경만 해야 했지만, 아름다운 일몰을 본 것으로 왕복 택시비는 충분히 뽑았습니다.
다시 먼 길 가야하니 배를 든든히 채우자 싶어 찾은 곳은 기차역 근처의 닭찜 집입니다. 낙지를 넣은 닭찜 메뉴와 꽤 좋은 후기들을 보고 찾은 곳인데 기대만큼 맛있었습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에 언 몸을 녹이기에도 충분했고, 볶음밥까지 먹으니 배도 든든했고요. 다음에도 강릉에 오면 다시 찾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아침 9시 기차로 강릉에 도착해 저녁 아홉시 반 기차로 떠났으니 열 두시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리던 경포호의 벚꽃 풍경을 십 년만에 마주했고, 제가 무척 좋아하는 강문 해변을 맨발로 걸었습니다. 가고 싶었던 카페에 기대하지 않았던 멋진 노을까지 봤으니 당일치기지만 풍만한 감정과 에너지를 얻고 돌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이렇게 카메라 하나 달랑 들고 짧게 다녀오는 나들이를 앞으로 더 자주 해야겠어요.
그리고 그 단골 여행지가 강릉이 될 것 같습니다.
봄 나들이 계획 중인 분이라면 더 늦어 꽃 떨어지기 전에 강릉에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