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때부터 가졌던 삼십대의 위시 리스트 셋 중 캘리그라피, 탭댄스를 배우고 남은 하나인 가죽공예를 시작했습니다. 캘리그라피와 탭 댄스를 배운 것이 벌써 삼,사 년 전이니 가죽 공예는 꽤 많이 미룬 셈이죠. 늘 마음 속에는 있었는데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며 일정 문제, 그리고 인연을 맺을 공방을 좀 더 유심히 찾아 본다는 핑계로 몇 년을 미루다 이제야 시작하게 됐습니다. 에르메스의 사선 스티치와 명품 브랜드 제품 카피 없이 자체 디자인을 고집한다는 소개에 이끌려 연남동에 있는 공방에서 한창 배우고 있습니다.
가죽의 냄새와 촉감이 좋아 막연히 동경했다가 제가 좋아하는 액세서리들 중 가죽 제품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직접 만들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시작했는데요, 한 달간 수강해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습니다. 재주 없는 제 손에서 그럴듯한 모양의 가죽 모양들이 나오니 네 시간의 수업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고, 마치치 못해 공방에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면 마치 아이를 두고 온 것처럼 보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공방이 그렇겠지만 처음으로 만든 제품은 카드지갑이었습니다. 마침 카드 지갑을 주로 사용하는 데다, 맘에 쏙 드는 제품이 없어 몇 개의 지갑을 돌려 쓰는 제게는 반가운 이야기였습니다.
몇 년간 기대했던 만큼 과정 하나하나가 흥미로웠습니다. 기본적인 카드 지갑의 형태에 직선과 곡선 등 마음에 드는 디테일을 더하고, 거기에 맞게 모눈지에 패턴을 그리는 작업이 첫 번째. 다음으로 각 파츠에 들어갈 가죽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컬러에 관심이 많은 터라 컬러 차트를 보며 머릿속으로 배색을 조합해보는 것이 대단히 즐거웠습니다. 첫 번째 작업물은 당연히 제가 사용할 것이니 제가 좋아하는 컬러들을 아낌 없이 섞어 다소 화려하게 배치했습니다.
토코놀 용액으로 거친 가죽 단면을 정리하는 작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하얀 용액을 바른 뒤 나무 봉으로 표면이 매끈해질 때까지 문지르는데, 이런 단순 작업을 할 때면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그렇게 각 파트의 재단과 기본 마감을 완료한 후 예상 완성도에 맞춰 배치를 해 봅니다. 앞,뒷면이 상반된 느낌으로 컬러를 배치했는데, 이 사진을 보신 어머니께서는 '뒤에 있는 건 엄마 거니?'라고 물으시더군요. -엄마 미안 나중에 알았지?-
각 파트를 본드로 고정한 후 그리프로 바느질 할 가이드를 뚫습니다. 이것 역시 고무 망치질이 스트레스를 푸는 데 좋습니다. 사실 제가 가장 못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꾸 소심함에 안쪽으로 그리프가 들어가서 치수가 맞지 않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다음으로 실을 선택. 포멀한 전면을 기준으로 해서, 배색과 같은 노란색 린넨사를 선택했습니다. 뒷면의 혼란한 배색은 뭐, 될대로 되라죠.
난생 처음 배운 바느질은 정말 재미있더군요. 단순작업할 때가 가장 즐거운 것을 보면 아무래도 저는 지금과 다른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선 형태의 땀이 특징인 새들 스티치는 처음 한 것 치고도 그럴듯하게 나와서 집에서도 연습해 보고 싶더군요. 마지막으로 지갑의 단면을 사포와 토코놀 용액으로 마무리. 그렇게 약 네 시간에 걸쳐 제 첫 번째 가죽공예 습작이 완성됐습니다.
새 식구가 들어온 기념으로 제가 가장 아끼는 소지품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죽에 바늘까지 총 네 가지 색을 사용한 뒷면이 더 마음에 듭니다. 혼란스러운 것이 제 정신 세계와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기본 바탕은 제가 좋아하는 녹색 빛이 도는 청록색 다코타 가죽입니다. 매끈한 질감이 제가 좋아하는 딱 그 느낌입니다. 거기에 배색은 노란색 푸에블로 가죽을 선택했는데, 다코타 가죽과 상반된 다소 거친 질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태닝이 되면서 다코타처럼 매끈해진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실까지 노란색으로 맞춰 최대한(?) 점잖은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근접 촬영을 해 보니 카드칸 단면이 깔끔하지 못한 것이 눈에 띄네요. 괜찮아요, 첫 번째잖아요.
뒷면은 바탕에 전면과 같은 청록색 다코타 가죽을 두고, 앞면을 상반된 보라색으로 붙였습니다. 가운데 칸 역시 튀는 색을 넣어 혼란함을 한껏 과시해보려 했는데 금방 질릴 것 같더군요. 둘 사이에서 제 몫을 할 것 같은 점잖은 회색을 넣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제가 꽤 좋아하는 배색이 됐습니다.
이니셜은 잠시 고민하다 역시 첫 번째이니 제 이름으로. 가까이서 보니 재단 불량과 함께 사선 스티치가 하나씩 튀는 것도 보이네요. -저는 괜찮다니까요-
- 원래 이런 거 잘 안 하는데 한 번 -
첫 가죽공예 습작인데 가죽을 자르고 붙여 바느질을 하는 과정도, 오직 내 취향 만을 생각해 선택한 색상도 모두 좋았습니다. 특히 배색이 마음에 들어서 오래 사용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아예 앞 뒤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게 하나 더 만들어 보려고요.
왜 진작 하지 않았는지 제가 원망스럽습니다.
첫 번째 결과물을 받아들고 보니 앞으로 제 손에서 탄생할 이런저런 가죽 제품들에 대한 기대가 무척 큽니다.
시계줄, 카메라 케이스, 스트랩, 가방 등등 리스트가 이미 빽빽해요.
두 번째 가죽 공예 습작 몰스킨 수첩 커버에 대한 포스팅은 아래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