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노래 몇 곡을 듣는 동안에도 풍경은 몇 번이고 감동적인 장면들을 빚어 시선 앞에 내려 놓았습니다. 어쩌면 이 모두가 떠나왔기에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강릉의 어느 해변에 앉아 보낸 어느 봄날 오후는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을 새삼 다시 일러줬습니다. 다름 아닌 '무작정 떠나볼 가치’에 대해서요.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었고, 버스를 타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 후,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이 얼마나 꿈 같은 일인가 싶어 스스로가 대견하기까지 했어요. 잰걸음으로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뒤엔, 챙겨 온 가방 속 내용물을 탈탈 털어 모래 사장 위에 깔고 그 위에 앉아 시간을 보냈습니다. 스마트폰과 무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요즘엔 잘 챙기지 않는 구형 아이팟으로 예전 음악들을 들으며. 오래된 음악과 파도 소리가 조화를 이루며 마음에 들고 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안목 해변을 배경으로 다양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맨발로 바다에 발을 담그며 즐거워하는 스무살 언저리의 청춘들, 말 없이 나란히 걷다 문득 동시에 멈춰 서서 바다를 보는 벗, 닿을듯 말듯한 거리의 두 어깨가 여러가지를 말해주는 연인의 뒷모습, 혼자 또는 믿을 수 있는 존재와 함께 바다를 보는 사람들까지. 저도 그 중 하나로 해변에 앉아서 떠나온 것 자체만으로도 꽤 많은 것을 느끼고 얻었습니다. 마음이 어느 방향을 향해 있는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실은 가는 버스에서 이미 많은 것들이 떠오르고 또 정리됐지만, 그것도 여행 그리고 떠나야 할 이유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여행에 이런저런 목적이 생겼고 무언가를 얻고, 기록하고, 만들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여행은 차라리 떠나지 않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렇게 주저 앉아 다시 겁 많아진 가짜 어른에게 한 번의 즉흥 나들이가 제법 큰 힘이 됐습니다. 그래서 이 날 바다에서 본 풍경들을 남겨 기억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