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그리고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일년 내내 생각이 나지 않다가도 그 시기가 되면 저절로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매일 불쾌지수라는 단어를 듣고 보게 되는 한여름에 저는 연꽃을 떠올리곤 합니다. 연꽃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이 여름 반짝 연꽃 시즌을 그냥 보내면 큰 잘못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무더위를 각오하고 나서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일년에 두어 번 두물머리에 가는데, 그 중 한 번이 이 한여름 연꽃 시즌입니다. 그리고 매번 공교롭게도 그 여름 가장 더운날을 땡볕에서 정신이 반쯤 나간채 의무감으로 꽃사진을 담아 오곤 합니다. 어느새 습관이 된 일입니다.
세미원은 여름철 연꽃을 보기 좋은 곳 중 하나입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근교에 제법 넓은 규모로 연꽃 테마파크가 조성돼 있고 입장료도 저렴한데다 근처 두물머리까지 한번에 둘러볼 수 있으니까요. 사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아마 가보지 않은 분이 드물 것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을 맞아 세미원 연꽃문화제가 진행중입니다. 꽃이 피기도 전인 6월 23일에 시작해 8월 20일까지 이어지는 꽤 긴 축제인데, 꽃구경 외에도 야간 개장 등 시즌에 맞춘 볼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입장료는 오천 원,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몇년 새 제법 오른 느낌이네요.
아주무척겁나게 더운 날이었습니다. 두물머리와는 인연이 많은데, 가장 더운 여름날 그리고 가장 추운 겨울날 방문한 적이 많아 그만큼 기억이 진하고 다녀온 후 몸살이며 장염으로 앓은 적이 많아 점점 애증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날도 가만히 서있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아침부터 무더위가 이어졌습니다. 분수의 물조차 습도를 높이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날 정도였으니 올 여름에도 아주 진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연꽃 문화제 기간 동안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진 LED 조명과 조명을 사용한 조형물이 세미원 안을 채웠습니다. 연꽃 외에도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만들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밤이 되면 무척 아름답겠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가족, 연인과 함께 찾는 이들의 몫이지 혼자 땀 뻘뻘 흘리며 사진이나 몇 장 담으러 온 제 몫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연꽃 시즌이 한물 갔다던 친구의 악담(?)과 달리 세미원 연꽃은 이제 절반쯤 피어 한창 절정을 향해 오르고 있더군요. 아마 이 글을 적는 이번주가 피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활짝 피다 못해 꽃잎이 벌어진 연꽃이 반, 아직 봉오리를 닫은 꽃이 삼분의 일쯤 되는 것 같았습니다. 후덥지근한 날씨는 내내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덕분에 하늘이 화창하고 볕이 쨍해서 연잎과 꽃의 색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연꽃을 찍으러 가면 유독 어르신들이 많습니다. 아마도 청춘들은 꽃보다는 '그' 혹은 '그녀'가 더 아름다워보이겠죠.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 사이에서 망원 렌즈로 꽃을 담다보면 이 더운 날씨에 그분들의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몇몇 분들은 저도 들기 힘든 큰 DSLR 카메라와 망원 렌즈를 들고 촬영을 하시고요. 화창한 날씨에 꽃의 색이 무척 아름다웠고, 그래서 한 시간 정도 계획했던 촬영이 두 시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옷은 땀에 흠뻑 젖고 갈증이 났지만 찍고난 후 LCD 화면으로 보는 꽃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만 더'를 반복했던 것 같아요.
함께 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 문화제를 가장 잘 즐기는 분들입니다. 꽃이 더 가득 피었다면 더 좋은 그림이 됐겠죠. 아무래도 꽃이 다 지기 전에 한 번 더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무더위에 엄두가 날지 모르겠습니다.
연꽃은 코스모스 다음으로 포토제닉한 꽃이라는 생각을 하며 짧은 연꽃 구경을 마쳤습니다. 탈진하기 딱 직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어 들린 두물머리, 여름이라 녹조에 잡초까지 자라 다른 계절보다 좀 어수선한 느낌이었지만 물가로 이어진 이 길을 걷는 건 참 즐거운 일입니다. 두물경까지 길이 이어진 후에는 일부러 걷기 위해 찾는 곳이 됐습니다.
다른 계절에도 있지만 여름이라 더 선명하고 뜨겁게 느껴지는 장면들도 걸음을 멈춰 담아 보고요.
올 때마다 습관처럼 담는 텅 빈 두물머리 포토존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뜨거운 한여름 연꽃놀이가 끝났습니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 세시간만에 녹초가 된 뜨거운 날이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고도 내년 여름에 또 생각 나겠죠? 다시 그립겠죠?
그래도 2017년의 기록에 연꽃 사진 한 장 빼먹지 않고 끼워뒀단 생각에 즐거운 날이었습니다. (라고 에어컨 바람을 쐬며 적습니다.)
- 내년 여름을 또 기대해 봅니다. 얼마나 더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