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보다 밤이 아름다운 싱가포르에선 늘 저녁 식사를 거르고 야경을 쫓아 다녔습니다. 아홉 시가 훌쩍 넘어 그제서야 배가 고파오면, 문 연 식당을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죠. 여행 둘째 날에도 가든스 바이 더 베이의 슈퍼 트리 쇼를 보느라 아홉시를 넘겼고 계획했던 식당은 영업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생각난 이름이 사테(Satay). 싱가포르 전통 꼬치 요리 사테 가게가 몰려있는 푸드 센터는 저처럼 밤을 헤매는 여행자를 두 팔 벌려 맞아준다고 들었거든요.
마침 마리나 베이와 멀지 않은 곳에 싱가포르 대표 사테 거리가 있어 서둘러 달려갔습니다. 이것마저 놓치면 굶어야 했으니까요.
싱가포르 사테 거리 라우 파 삿(Lau pa sat)
라우 파 삿, 그리고 텔럭 에이어 마켓(Telok Ayer Market)라고도 불리는 이 시장은 싱가포르의 대표적인 사테(Satay) 거리 중 한 곳으로 손꼽힙니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은 천연 기념물로 지정돼 있고, 현재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한 푸드 센터로 운영중입니다. 여러모로 그 의미가 남다른 곳이죠. 건물 내부에는 다양한 싱가포르 레스토랑이 운영중이고, 해가 진 후에는 건물 주위로 늘어선 사테 노점들이 자욱한 연기를 뿜어냅니다. 지하철 Raffles Place 역에서 걸어서 갈 수 있고, 멀라이언 파크와도 그리 멀지 않으니 싱가포르 야경을 감상하고 야식을 이 곳에서 즐기면 완벽한 하루 마무리가 되겠죠?
식민지 시대 영국의 건축가인 조지 콜맨(George Coleman)이 설계한 시장 건물은 팔각형 모양과 화려한 기둥이 조화롭습니다. 푸드 센터로 쓰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내부로 들어서니 제법 넓은 건물에는 전통 요리부터 퓨전 요리까지 다양한 레스토랑이 영업중이고, 테이블이 빽빽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제법 늦은 시간이라 이미 문을 닫은 식당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야식을 즐기는 사람들 수가 적지 않았습니다. 사테 거리는 건물을 가로질러 나가면 있습니다.
문을 나서는 순간 눈 앞에 연기가 자욱하고 조명이 대낮처럼 환해서 '이곳이구나' 싶었습니다. 건물 내부에는 빈 테이블이 많았지만 야외에 한 판 벌어진 사테 거리에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유명한 가게의 테이블은 빈 자리를 찾기 힘들더군요.
음식을 먹기 전에 이미 이 연기 자욱한 풍경에 반하게 됩니다. 가지런히 늘어선 꼬치들이 불에 구워지는 모양새가 낯설지 않습니다. 실제로 사테 요리는 한국인들도 전혀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맛과 향, 모양 모두 친근합니다. 지붕이 없는 야외 시장임에도 사테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르더군요. 꼬치 굽는 풍경과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북적북적 즐겁게 떠드는 소리가 만드는 운치가 대단한 곳이었어요.
익숙한 한국어가 보이는 가게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니 사진 속 푸근한 인상의 부인이 서툰 한국어로 제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늘 고민을 하게 되죠. 그래도 유명한 곳이 무난하겠지, 아니야 이런 곳들이 비싸고 맛도 별로야. 잠시 고민했지만 아주머니 수완이 좋으신지 저는 어느새 플라스틱 테이블에 앉아 사테 세트와 타이거 맥주 한 잔을 주문했더군요.
혼자 여행오면 이렇게 2-3인용 세트를 혼자 모두 먹어야 하니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그렇다고 남긴 적은 없던 것 같습니다. 26달러의 사테 세트를 주문했습니다. 소고기와 양고기 꼬치 각 10개, 새우가 8개로 총 28개나 됩니다. 이걸 저는 혼자 먹겠다고 주문하긴 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두 명이서 열 개 내외를 먹는 것 같더군요.
한화로 2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니 꼬치 한 개당 천원이 되지 않는 셈입니다. 두 세 명이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괜찮은 세트겠군요.
물론 저는 혼자 다 먹었습니다.
직화로 구운 새우는 평소 새우를 잘 먹지 않는 저도 알뜰살뜰 머리까지 먹도록 만들었고,
소고기와 양고기 꼬치는 뭐 맛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구울때 바르는 소스가 단맛이 강해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맥주 안주로는 그만입니다. 땅콩의 고소한 맛이 일품인 찍어먹는 소스와도 아주 잘 어울리고요.
전날 칠리 크랩을 먹으며 '타이거 맥주는 칠리 크랩을 위해 만든 맥주일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이 날 사테 거리에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꼬치 28개를 완치(?)하느라 배가 불러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아쉬울 정도로 타이거 맥주는 사테와 찰떡 궁합입니다. 싱가포르 맥주 참 맛있었어요.
깔끔하고 멋진 식당에서 고급스러운 요리를 먹는 것도 좋은 여행이겠지만, 역시 저는 이렇게 시장의 정취가 맛보다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멋진 짝과 사테와 타이거 맥주를 함께할 날이 오길 바랍니다. 그 땐 그 날보다 더 큰 세트를 주문해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