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양식의 추억"
지금 들으니 촌스럽기 그지 없습니다만 그 때는 저 말이 왜그리 근사해 보였는지요. 허여멀건한 수프와 마가린 냄새 가득한 모닝빵, 칼로 썰어먹는 넓은 돈까스에 달콤한 후식까지. 저같은 '아재'들 가슴속에 종종 잊을지언정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경양식의 추억입니다. 아쉽게도 어릴적 저는 이 고급스러운 식사를 즐긴 기억이 많지 않지만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 오후 당시 번화가인 돈암동에서 먹던 2900원짜리 돈까스 맛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다시 먹으라면 고개를 젓겠지만 그 추억만큼은 더없이 사랑스럽습니다.
그 후로 20년쯤 지났을까요, 다신 이런 식당에 갈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친구의 안내를 받기까지는요.
그렇게 인덕원의 '에버그린'의 문을 여는순간 아주 오랜만에 다시 경양식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얼마전 먹는 TV쇼 삼대천왕에도 출연한 곳이라고 하네요.
매달린 조명이며 테이블의 모양, 탁자와 유리 사이에 끼워진 식탁보며 곳곳에 걸린 그림이며 소품이 마치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분위기만큼은 그 시절의 매력을 양껏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름부터 참 그시절스럽습니다.
20세기에는 저 글씨체가 최고였는데 말예요. 메뉴는 원래 두가지지만 방송 후 사람이 몰려서인지 당분간은 에버그린 돈까스 하나만 판매한다고 합니다. 다녀온 후 몇몇 후기를 보니 치즈 돈까스가 맛있다고 하던데 아쉬운 일입니다. 가격은 9000원으로 직접 구운 식전빵과 스프, 샐러드가 포함돼 있습니다.
직접 구운 식전빵은 따뜻해서 좋았고 포근한 식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다녀온 후 총평으로 이 곳에선 메인인 돈까스보다 이 빵이 더 맛있었다고 할 수 있을만큼 빵은 무척 만족했습니다.
경양식의 상징 스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학생 때 먹던 2900원짜리 돈까스에는 당연히(?) 3분 스프가 나왔는데 이곳은 그보단 조금 낫습니다. 양파 향이 많이 나는 것이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저는 마음에 들더군요. 먹고나면 왠지 더 배고픈데 그래도 이렇게 스프로 시작하는 것이 경양식의 정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도 요것을 다 먹기 전에 돈까스가 나오겠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돈까스가 나왔습니다. 빵과 스프, 돈까스를 모두 올려 놓으니 근사한 경양식 한상입니다. 이런 광경을 얼마만에 보는지, 내심 감격했어요.
넓게 편 돈까스의 모양이며 크기, 올려진 소스의 색상까지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곁들인 샐러드와 밥, 감자까지 아마 꽤 오래 전부터 변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르신들 그리고 아재들이 오면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오랜만에 보는 이 진풍경에 반해 이 곳을 맛집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고기 한덩이와 반덩이 정도가 더 나오는 돈까스는 양이 무척 많아 보였지만 역시나 '넓게 편' 고기라 성인 한 명이 먹기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곳의 돈까스가 찾아가서 먹을 정도냐면 저는 추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며 그리고 음식을 받으며 줄곧 20년전 먹은 2900원짜리 돈까스를 떠올렸는데 먹으면서도 그 감정 이상을 특별히 느끼지 못한 것을 보니 이 돈까스는 어디까지나 저의 추억 소환용, 그 시절을 다시 음미하는 별미 이상은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그 시절 2900원짜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기와 스프, 빵의 품질이 좋았지만 저는 이제 신세대가 되어버린건지 요즘 돈까스가 더 좋습니다.
이 곳에 오기전 방송으로 미리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땐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는데 직접 와서 먹게되니 오히려 그 감정이 반감되어 아쉽습니다. 삼대천왕에 나온집을 종종 우연히 혹은 찾아서 가게 되는데 요즘은 실망할 때가 많군요. 뭐, 맛집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겠지만요.
그래도 오랜만에 경양식의 추억에 젖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