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맛을 알지 못하는 네가 너무 불쌍해"
이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냐는 제 질문에 친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렇게 밍밍한 첫경험 후에 한동안 냉면을 먹지 않았습니다. 원래 그리 즐기지도 않았거든요. 근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작년부터 이 심심하고 차가운 면의 매력에 빠져 겨울에도 몇번을 찾았습니다. 주변의 추천을 받아 서울시내 네 곳의 평양냉면집을 시간날 때마다 찾아 다니며 한없이 심심하던 이 냉면 육수에 밴 육향이나 깊이를 맡게 되었고 서로다른 면을 짧게 혹은 오래오래 씹어가며 평가를 하는 시간이 매우 즐거웠습니다. 냉면을 무척 좋아하지만 찬 음식에 약한 짝꿍은 저와 함께 냉면을 먹다 몇번을 체했는지 모릅니다.
아직 봄을 다 놓지도 못한 5월부터 더위가 대단합니다. 이러다 올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이 올까 벌써부터 두렵습니다. 자타공인 냉면의 계절 여름을 한발짝 앞두고 제가 근래 다닌, 그 후로 즐겨 찾고 있는 서울시내 유명 평양냉면집 4곳에 대한 간단 소감과 평가를 남겨보려 합니다. 아무래도 음식평이다보니 먹어본 주관적인 의견이라는 것 그리고 이제 막 평양냉면에 맛을 들인 입문자의 개인적인 의견임을 감안하시고 가볍게 봐주시면 다가올 여름에 즐거운 고민이 하나 추가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을지면옥
서울 중구 충무로14길 2-1, 가격 10,000 원
을지면옥은 지난 여름 시작된 제 4대 냉면 투어의 출발점이자 요즘도 종종 즐겨찾는 곳입니다. 긴 복도를 들어서는 순간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건물부터 소품들이 그 시절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스테인리스 그릇에 다소 '모양 없이' 담겨 나오는 냉면의 모양새까지 그 시절의 촌스러움 혹은 순수함을 닮았습니다.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매우 맑은 육수는 면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밍밍'하지만 끝맛에 육향과 감칠맛이 도는 것이 무척 깨끗하고 개운한 느낌입니다. 비교한 다른 곳과 다른 점은 파 그리고 고춧가루를 얹어 향과 맛을 더한 것인데 이부분이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저처럼 평양냉면 육수 특유의 깔끔함과 개운함을 선호하는 분이라면 파와 고춧가루의 향이 방해꾼으로 느껴질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방문때는 고춧가루와 파, 깨같은 고명을 빼달라고 요청해볼 계획입니다.
비교한 네 곳의 냉면 중 면이 가장 가늘고 메밀향이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씹을수록 구수한 메밀면의 맛을 좋아하는 제게는 일반 냉면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면의 찰기 역시 다른 곳보다 강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종종 을지면옥을 찾는 이유는 맑고 깨끗한 육수와 그나마 합리적인 만원의 가격, 그리고 옛 정취 간직한 분위기가 주는 특별함 때문입니다. 가성비를 따지자면 이곳을 네곳중 상위권으로 꼽게 됩니다.
육수 | ★★★☆☆ 면 | ★★☆☆☆ 고명 | ★★☆☆☆ 가격 | ★★★☆☆ |
우래옥
서울 중구 주교동 118-1, 가격 12,000 원
냉면투어 두번째 방문지였던 우래옥은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기대한 곳입니다. 이 평양냉면에 대해 잘 몰랐을 때에도 이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네곳 중 가장 실망한 냉면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곳을 평양냉면의 대표격으로 꼽으시는데 제가 생각하던 평양냉면의 깨끗하고 깔끔한 육수에 비해 우래옥의 냉면은 진하고 육향이 강했습니다. 이점이 오히려 평양냉면을 심심하다며 꺼리는 분들에게 입문용으로 적합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저는 이 강한 육향 때문에 먹고난 후 한동안 입 안에 맴도는 향을 없앨 입가심거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고명은 무채와 물김치, 파 등이 올라가는데 -고기는 기본이니까요- 전반적으로 간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더불어 을지면옥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평양냉면에 파의 강한 향이 있는 것이 싫은 것 같습니다. 면은 을지면옥과 비슷한 정도로 가늘지만 그보다 메밀 함량이 높은지 구수한 맛이 있었습니다.
우래옥은 가게에 들어설 때 가장 기분좋은 곳입니다. 2층으로 된 상당히 큰 규모에 수십년째 자리를 지키는 듯 멋진 신사복 차림의 홀 매니저 어르신과 직원 이모님의 서비스가 웬만한 고급식당 못지 않거든요. 왠지 냉면 한그릇 먹고 나오기 민망할 정도로요. 물론 냉면 가격도 그에 맞춰 다소 비싼 12,000 원입니다. 우래옥은 이 날 방문 후 저와 짝꿍이 다시 가지 않는 곳이 됐습니다. 강한 육향과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 여름 더위를 쫓을 시원함과는 거리가 있었거든요.
육수 | ★★☆☆☆ 면 | ★★☆☆☆ 고명 | ★★★☆☆ 가격 | ★★☆☆☆ |
봉피양
서울시내 약 10여개의 점포, 가격 12,000 - 13,000 원
봉피양의 장단점은 명확합니다. 장점은 네곳의 냉면집 중 프랜차이즈 시스템이 가장 체계화돼 있어 서울 시내 곳곳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 최근엔 롯데백화점에도 입점해 한여름에도 줄 서지 않고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단점이라면 네 곳 중 가장 비싼 가격. 13,000 원은 이 집 냉면의 퀄리티를 고려해도 냉면 한 그릇 가격 치고는 과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왜 저는 한달에 꼭 한번은 봉피양 냉면을 먹게 된 걸까요?
거대 프랜차이즈가 된 벽제갈비의 냉면 브랜드인 봉피양은 어느 점포에 가도 그럭저럭 균일한 품질의 냉면을 먹을 수 있습니다. 육수는 우래옥과 을지면옥의 중간 정도로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르실 것입니다. 밍밍한 평양냉면의 육수라기엔 육향이 확실히 있는 편이고 감칠맛도 있습니다만 과하지 않은 정도라 육수를 들이켰을 때 고소함과 개운함이 모두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봉피양 냉면의 장점을 고명으로 꼽는데 배추김치가 간이 강하지 않으면서 면과 함께 먹을때 새콤하게 입맛을 당기는 매력이 있어 평양냉면의 고명을 좋아하지 않는 제 입맛에 잘 맞습니다. 그 외에 달걀 지단이 올라가 있는 것이 특징인데 그리 반갑지는 않아도 육수 맛을 해치지 않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합니다.
우래옥과 을지면옥보다 두꺼운 면은 메밀함량이 높아 질기지 않고 툭툭 끊어지는 메밀면의 매력을 잘 표현합니다. 오래 씹으면 씹을수록 그 풍미가 살아나는 이 면 덕분에 가장 비싼 가격에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냉면이 되었습니다. 놋그릇에 담겨 나오는 모양새 역시 네 곳중 가장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역시 가격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와 짝꿍은 봉피양 냉면을 '다 좋은데 가격이 문제'라고 평가합니다. 네곳중 가장 저렴한 10,000원에 비해 3,000원 비싸지만 이것이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역시 '접근성'을 무시할 수 없는것이 최근 인천공항점이 오픈해 귀국 후 자연스레 향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점포별로 가격이 조금씩 다른것이 재미있으면서도 무섭습니다(?).
육수 | ★★★★☆ 면 | ★★★☆☆ 고명 | ★★★★☆ 가격 | ★☆☆☆☆ |
을밀대
서울/경기 4개 점포, 가격 10,000 원
상대적으로 제게는 생소했던 을밀대는 네곳중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입니다. 만원의 가격과 봉피양의 그것과 견줄만한 높은 퀄리티의 메밀면, 별다른 고명없이 오이와 배로 달고 시원한 맛을 더한 구성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을밀대 냉면의 육수는 네 곳중 우리가 생각하는 평양냉면의 그것과 가장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육항이 많이 느껴지지 않고 끝맛에 감칠맛이 살짝 도는 정도입니다. 평양냉면 좋아하는 저와 짝꿍도 이 육수는 조금 심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시원함을 위해 육수에 살얼음을 띄운 것도 육수맛을 제대로 느끼는 데 방해가 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육수 인심이 다른 곳보다 짜서 면에 비해 확실히 빈약합니다. -물론 더 달라면 주시지만- 씹을수록 구수한 메밀면은 무척 맘에 들었고 평양냉면의 기본에 충실한 곳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이곳은 확실히 대중적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을지면옥과 동일한 만원의 가격은 나머지 두곳과 비교하면 확실한 우위가 되겠죠?
육수 | ★★☆☆☆ 면 | ★★★☆☆ 고명 | ★★★☆☆ 가격 | ★★★☆☆ |
이렇게 이렇게 오래 걸릴줄 몰랐던 서울시내 유명 평양냉면집 4곳 탐방, 냉면 평가를 적어보았습니다. 역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육수'가 아닐까 싶은데요, 맑고 깨끗하면서도 끝맛에 살짝 육향과 감칠맛이 도는 육수를 좋아하는 분들은 봉피양이나 을지면옥, 강하고 풍부한 맛을 선호하시면 우래옥을 방문하시면 실패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평양냉면 고유의 수수함을 더욱 깊이 즐기고 싶다면 을밀대의 냉면도 충분히 도전해볼 만 합니다. 그와 함께 조화를 보이는 면은 을지면옥과 우래옥의 가늘고 세련된 면, 봉피양과 을밀대의 투박하지만 재미있는 메밀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평양냉면에는 메밀면이 잘 어울린다 생각하기 때문에 오래오래 씹으며 즐겨 보시기를 권합니다.
작은 차이를 떠올려 글과 별 표시로 나름 평가해보았지만 다들 매력있는 냉면이 분명하고 어떤 것을 선택하셔도 여름 더위에 지친 입맛을 달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 혹시 또 맛있는 냉면집 알고 계시면 알려주세요.
다가오는 여름, 냉면으로 무사히 이겨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