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달이 지난 얘기지만, 퇴사하고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차를 다 써버린 제 입장에서는 재직 중엔 불가능한 일이었거든요. 서울에서 좋아하는 카페를 꼽으라면, 그리고 좋은 사람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을 고르라면 가장 먼저 손에 꼽을 곳입니다. 가을이 절정을 지나고 겨울 냄새가 날 때쯤 갔으니 지금과 날이 크게 다르지 않겠네요.
여유로운 동네 성북동. 드문드문한 복작거림마저 사라지는 안쪽 깊은 곳에 있는 전통 찻집입니다. 요즘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새로 지은 한옥이 아니라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선구자 이태준 작가의 집필 공간을 보존해 전통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장님이 작가의 외종 손녀라고 하시고요. 가옥 자체로도 가 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현대식 건물 사이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래도 툇마루에 다리 뻗고 앉아 있으면 고즈넉하다,라는 말이 절로 생각이 나죠
.
있는 그대로 놓아둔 듯 하지만 자세히 보면 곳곳을 세심하게 신경 쓴 태가 나기도 합니다. 반질반질한 마루가 그렇고 곳곳에 장식으로 놓아둔 찻잔과 오랜 재봉기, 마당에 소담스레 핀 꽃들이 그랬습니다. 이날은 사람이 많아서 안쪽까지 구석구석 둘러보지 못했지만, 다음에 방문한다면 멋진 전통 가옥을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어요.
자리가 부족해서 툇마루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날이 좀 쌀쌀하긴 했어도 볕이 잘 들어 괜찮았던 기억이에요. 방석과 작은 상이 멋스러운 좌석이었습니다.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를 배경 삼아 여유를 즐기기도, 이야기 나누기도 좋은 자리였어요. 오히려 안쪽보다 더 좋았겠네요, 이런 날에는.
화장실 가는 길에 슬쩍 담아 본 안쪽 좌석. 바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나무 마루에 오래된 상이 놓인 내부도 그렇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다분히 전통적인 분위기가 눈과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다음엔 꼭 이 자리에서 오후를 보내보리라 다짐했어요.
가장 유명한 메뉴 중 하나인 단호박 빙수를 주문했습니다.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었지만 양이 제법 되고 단호박과 팥이 눈으로 보기에도 정성 들인 티가 나서 만족했습니다. 입에 넣으니 강하지 않지만 자연스러운 단맛이 나는 것이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것 같더라고요.
차가운 날씨지만 빙수가 그럭저럭 잘 어울렸고, 빙수 양이 꽤 많아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화젯거리가 됐습니다. 이곳은 앉아있는 시간 자체가 멋이 되는 힘이 있었어요. 같은 시간이지만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바쁘게 내려 준 커피를 마시며 허전한 무언가를 채우는 것보다 살뜰하게 쓰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시 봄이 왔으니 조만간 다시 한 번 찾아가 그 특유의 여유와 행복을 즐기고 와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