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3박 4일 일정으로 제주에 머무르고 왔습니다. 당초 계획은 2박 3일이었지만 태풍의 영향으로 비행기가 결항돼 하루 더 머물 수 밖에 없었죠. 예정에 없던 휴가를 하루 더 내야했고, 그 하루는 세찬 비바람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호텔방 안에서 보냈습니다. 비행기 결항 소식을 받은 직후에는 여느 회사원처럼 휴가가 아쉬웠고, 많은 여행자처럼 방에 갇혀 있는 시간이 야속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지난 시간을 반추하니 방 안의 고요가, 한가로운 낮잠이, 싸구려 커피와 컵라면 그리고 맥주같은 것들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그동안 몰랐던 여행의 다른 얼굴을 보고 온 것 같아요.
돌아오자마자 바쁘게 밀린 일들을 해야했고, 섬에서의 여유가 언제였냐는 듯 회사원의 일상이 빠르게 똑같이 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행 이야기를 차근차근 늘어 놓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 제주의 9월, 가을 소식을 사진으로 우선 전하고자 합니다. 도착한 날과 돌아오는 날에는 화창하고 뜨거운 환영 그리고 배웅이, 오롯이 섬에 머문 이틀은 매서운 바람과 축축한 비가 있었습니다. 일정이 태풍에 겹친 것은 누가 보기에도 아쉬울 수 있겠으나, 정작 그간 섬에 있었던 저는 충분히 즐거웠어요.
이번 제주 여행 역시 올림푸스 카메라와 함께했습니다. 맘 먹고 떠난 출사 겸 여행이라 카메라 두 대, 렌즈 여섯 개로 욕심도 잔뜩 부려봤죠. 덕분에 마음에 드는 가을 소식을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특히 폭우에도 고장 걱정 없이 촬영할 수 있었던 E-M1 Mark II와 M.ZUIKO PRO 렌즈들의 방진방적 성능에 다시 한 번 감탄한 시간이었어요.
어떤 사진은 다분히 제주스럽기도, 또 어떤 것들은 다른 어떤 곳 같기도 합니다. 몇 장은 친한 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을 만하지만 제게만 의미있는 사진들도 몇 장 있습니다. 다시 오지 않을 9월 끝자락 그리고 가을 문턱의 섬 풍경입니다.
무쏘 한 대로 세계 곳곳을 누비다 이제 제주에 정착한 사진가가 이렇게 좋은 날에 어울리는 곳이 있다며 소개한 해변입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니 당연하겠지만 제주의 바다는 몇 걸음마다 딴세상에 온 듯 다른 풍경이 펼쳐지니 앞으로 몇 번을 더 와야 무덤덤해질 수 있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이 들렸는지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이 섬에선 하루하루가 새롭다는 말을 건넸습니다.
제주에 몇 년 머물다 보면 잔뜩 찌푸린 하늘, 자욱한 구름들 사이로도 노을의 씨앗들이 보이나 봅니다. 오늘 저녁 하늘이 볼만할 것 같다는 말에 일행 모두가 가까운 오름에 올랐고, 정말로 구름 사이로 타는 듯 붉은 빛이 비쳤습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사진 몇 장, 생각 몇 개 만으로도 찬 숨 삼키며 오른 수고를 충분히 보상 받았습니다.
태풍이 서서히 섬을 드리웠고,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이럴 때 어울리는 숲이 있다며 그는 거칠게 차를 몰고 알 수 없는 길을 달렸습니다. 자동차 네비게이션 화면이 글씨 없는 백지가 됐고, 거친 자갈길에 차가 쉬지 않고 기우뚱거렸습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반듯하게 솟은 나무들 사이로 이어진 멋진 산책로였습니다. 비에 젖은 공기 덕에 길 끝이 부옇게 보여 더 운치가 있었죠.
'멋지죠?'
'여기서 사계절을 사진으로 담고 있어요'
'여자친구에게 프로포즈 한 곳이에요'
저는 그저 네,네,네라고만 답할 수 밖에 없었어요. 샘이 났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섬이 좋고 기다렸던 여행이라지만 비가 더 거세지니 어디라도 들어가 몸을 녹여야겠더군요. 곳곳에 주인장의 손길이 느껴지는 산장에서 스튜로 몸을 데우고 위스키가 든 아이리시 커피로 마음을 덥혔습니다. 그리고 찾은 곳이 빛의 벙커. 제법 넓은 공간에 빈 틈 없이 작품들이 지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만큼 큰 소리들이 귀를 지나 가슴을 흔듭니다. 진짜 그림이 아닌 조명들의 집합인데도 꽤나 큰 울림이 있는 곳이었어요. 함께 그림 얘기 나누길 좋아하는 친구가 생각나 메시지를 보내려는 걸 겨우 참았어요.
종일 호텔방에 갇혀 좀이 쑤시려던 찰나, 창 밖으로 노란 빛줄기가 보였습니다. 고민 없이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챙겨 호텔을 나섰습니다. 시계를 보니 곧 해가 질 시간이라 가장 가까운 서귀포 바다로 갔습니다. 가는 동안 노을이 십 수 가지 색으로 변했고, 구름과 물의 파도 가득한 풍경이 제가 좋아하는 아리 그뤼에르의 사진 속 장면같았습니다.
주변이 보이지 않을만큼 깜깜해질 때까지 사진을 찍는 동안, 혼자란 게 다행이기도 불행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3박 4일의 짧은 가을 여행이 끝났습니다.
여행마다 비를 몰고 다니는 제게 카메라 선택은 그간 무척 어려운 일이었습니다만, 올림푸스 카메라를 사용하면서부터는 비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폭우 속에 카메라를 삼각대와 함께 세워놓기만 한 적도 많았죠.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제가 올림푸스 카메라를 사용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내구성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싶어요. 덕분에 3박 4일간 마음껏 담을 수 있었고, 마음에 남는 장면들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곱씹으면서 공간과 시간 그리고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을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