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건 사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입니다만 그와 상관 없이 제 여행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사진이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행 일정과 장소가 결정되면 어떤 카메라와 렌즈를 가져갈지부터 고민할 정도니까요. 이제 '지난해'가 된 2018년은 출간 준비와 개인적인 일들로 긴 여행을 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동해와 제주, 부산 등 국내 여행지들의 매력을 재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 잘 실감나지 않는 새해의 첫 주, 저와 대부분의 여행을 함께하는 올림푸스 카메라로 담은 2018년의 장면들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2018년은 늘 갇혀있는 듯 답답했는데, 정리하다 보니 그래도 틈틈히 짧지만 짙은 여유를 즐겼더군요.
2018년 봄, 여수 봄바다
서울에 한기가 채 가시기 전인 4월 초, 주말을 이용해 여수를 다녀왔습니다. 3월 중순 초고를 완성한 뒤 어디라도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새벽녘 KTX 티켓을 끊고 그길로 짐을 챙겨 나섰죠. 전부터 가 보고 싶던 ‘여수’에 직접 발을 딛는 것 외에는 다른 목표도 없어 가방에는 여분의 티셔츠 한 벌과 카메라뿐이었습니다.
처음 찾은 여수는 기대했던 것보다 소박하고 정감있는 곳이었습니다. 이제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됐지만 중심가를 제외하면 어릴적 동네 골목길을 떠오르게 하는 소박하고 낡은 풍경들이 여전하더군요. 거기에 어딜 가도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이 환상적이었습니다. 일찌감치 전망대에 올라 말로만 듣던 여수 밤바다를 감상하고, 허름한 여관에서 두 시간 쪽잠을 잔 뒤 향일암에서 일출을 맞았습니다. 시내에 돌아와 바다가 시선 가득 보이는 루프톱 카페 옥상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난 뒤의 상쾌함을 아직 잊을 수가 없어요.
사진 찍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던 제게 여수는 멋진 포즈를 취해줬고, 언제든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됐습니다. 덕분에 헛헛한 마음에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사진들을 보니 다른 것들보다 여유가 넘칩니다. 그 날의 감정이 함께 담긴 거겠죠?
2018년 여름, 부산과 강릉
날짜는 아직 5월이었지만 부산으로 내려가니 해운대는 이미 여름이 한창이더군요. 해수욕장엔 사람들이 가득했고 외투까지 걸친 저는 영락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결국 운동화와 양말이라도 벗고 미리 휴가를 즐겼죠. 이 때도 별다른 계획 없이 사진 찍으러, 그리고 가급적 바다를 많이 보고 싶어서 부산으로 향한 것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해운대 해변을 보니 그동안 부산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던 환상을 사진으로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횡단보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화려한 번화가와 한적한 모래사장이 마주보고 있는 부산만의 풍경이 갖는 아름다움들요.
만 24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해운대와 태종대, 광안리를 둘러보았습니다. 여수나 강릉같은, 도시사람들이 기대하는 한적한 해변 풍경은 아니지만 부산만의 맛이 있고 그것을 다른 도시가 대체할 수 없으니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부산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서울은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혹한이 이어지고 있지만, 부산에 가면 포근할 것 같아 요즘 더 생각이 납니다. 처음으로 여름에 부산을 찾았던 해라서 기억에 남습니다.
원고가 잘 진행되지 않아 한창 고민중일 때, 무작정 터미널에서 강릉행 버스 티켓을 샀던 것이 아마 올 해 제가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시간 후 강릉 터미널에 도착해 다시 버스를 타고 삼십 분, 카페가 몰려 있는 해변으로 유명한 안목에 도착했는데, 마침 날도 눈부시게 좋아서 서울에서의 고민과 스트레스따위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커피나 한 잔 하고 가려다가 해변에 발이 묶여 주변을 뱅글뱅글 돌다 결국 가방을 모래사장에 깔고 주저앉아 보낸 시간은 제 삼십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여유가 됐습니다.
커피 한 잔 하러 강릉에 왔다는 말을 사람들은 우스개로 여겼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습니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그리고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서 창 밖 풍경을 보며 원고에 적을 내용들이 정리되기도 했으니 다녀오길 정말 잘했죠. 이 날 이후로 저는 문장이, 원고가 막힐 때면 버스를 타게 됐습니다.
2018년 가을, 서울과 제주
매년 가을이 짧아지고 있다지만 올해는 좋은 곳에서, 멋진 풍경들을 만끽해서인지 여느해보다는 풍성하게 보냈습니다. 노을로 물든 하늘공원의 억새밭과 깨끗한 햇살 받아 반짝이는 구리 코스모스밭에서 제가 왜 가을을 좋아하는지 새삼 확인했습니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후라 그런지 하루하루가 더 감동이었던 것 같아요.
파란 하늘과 붉은 노을이 멋진 그러데이션을 만들던 저녁 시간에 '그래, 이 정도면 서울에서도 살 만하지.' 라고 몇 번이나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에도 가을엔 해외 여행을 잘 가지 않았더군요. 늘 아니라고 해도 제가 사는 도시를 제법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침, 저녁으로 몰라보게 쌀쌀해졌을 때는 친구와 제주를 다녀왔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감상을 나누는 것이 오랜만이라 돌아오는 날까지 영 어색했는데 그래도 덕분에 혼자 여행할 때보다 푸짐하게 식사를 하고, 잠시 눈도장 찍고 떠날만한 곳에서 진득하게 머물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제주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전에 찾았을 때와 제법 다른 곳으로 새겨졌으니까요. 다음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오고싶다는 숙제가 생겨버렸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다채로운 풍경이 있는 곳인 것은 분명합니다. 관광객이 많아진 후로 전같은 여유와 감동은 없다지만 그럼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석같은 곳들이 많고요.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 한 제주는 자주 가고 싶습니다. 혼자 또는 함께, 함께 가는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여행이 될 것 같습니다. 짐 없이 가벼운 카메라 하나만 들고 다녀와서 더 좋았습니다.
2018년 겨울, 짧은 속초 나들이
'무언가를 잊고 싶을 땐 파랑이 떠올라'
언젠가 했던 이 말에 제가 설득이 된 건지 이제 자연스레 바다가 떠오르는 날이 생겼습니다. 일 년간 준비한 책 원고를 마친 뒤 하루 동안은 가벼워지고 싶어 속초행 버스를 탔습니다. 점심 시간 지나 도착했으니 별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지만 터미널 근처에 있는 해변과 호수가 보이는 카페에서, 도착하니 그제서야 왔던 곳이라는 것이 기억난 전망대에서 하늘과 바다의 파랑을 보는 시간으로 충분한 위로였습니다.
걸음은 여유로웠지만 마음은 분주해 종일 끼니도 거른 그 날이 지나고 보면 무척 풍요로웠습니다. 반나절도 안 되는 짧은 나들이었지만 올 해 다녀온 어떤 여행과 비교해도 아쉽거나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되도록 멀리 떠나려고 했던 제 생각에 새삼 반문을 던지게 된 날이었어요.
몇 번의 짧은 여행들을 정리해보니 공통점이 있네요. '바다'
새해에도 길고 짧은 여행들을 다닐텐데 그 때도 얼마나 바다를 찾아 다닐지 눈여겨봐야겠어요.
그리고 크고 작은 일상들 속에서
그 외에도 많은 일상의 장면들을 올림푸스 카메라로 담았습니다. 첫 조카가 태어났고 어느 해보다 무더운 여름을 잘 버텨냈습니다. 새로운 취미 가죽공예도 배웠습니다. 겨울에는 두 번째 책도 출간됐고요. 별 일 없이 한해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넘겨보니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네요. 모두 다 놓치지 않고 사진으로 담아낸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이제 막 시작된 2019년 한해, 저와 여러분 모두 지난해보다 더 멋진 순간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