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강릉에 갔을 때는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냥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비가 올듯말듯 흐리멍텅한 하늘 때문에 만물의 색이 우중충해서 저절로 기분이 가라앉을 정도였죠. 취재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궂은 날씨에도 이곳저곳을 다녔는데, 덕분에 이전에는 모르던 강릉 바우길 5구간과 그 주변 관광지들의 매력을 알게 됐습니다. 5월에 처음 강릉을 찾았을 때 날씨가 정말 눈부시게 좋았는데, 그 때 발견했다면 좀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요.
이 날엔 안목 해변에 있는 그림 골목과 허난설헌 생가 복원 터, 송정 해변가에 길게 뻗은 솔숲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문 해변과 경포대를 잇는 강문 솟대바위를 찾았습니다. 야경이 아름답다고 해서 일부러 늦은 오후에 맞춰 찾아갔는데, 사진에서 보이듯 날씨가 잔뜩 흐려서 사진 찍는 것은 포기하고 일찌감치 돌아갈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파도도 무척 강해서 나들이, 여행 오신 분들도 바닷물에 발 담글 엄두조차 내지 못하시더군요. 설상 가상 다섯 시쯤부터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강문 솟대다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방파제가 뻗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다를 보면 무척 근사할 것 같은데, 날이 워낙 좋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파도가 높은 날엔 방파제 위까지 바닷물이 넘어옵니다. 맑고 화창한 날 해수욕을 즐기기엔 아주 멋진 스팟이 되겠네요. 좋겠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머릿속 상상일뿐, 이 날은 강문해변쪽 방파제 끝에서 야속한 바다와 파도만 멍하니 바라보며 빨리 밤이 와 솟대 다리의 야경을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 방파제에서 본 강문 해변 -
강문 해변에는 프레임과 이젤, 반지 등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모두 바다를 배경으로 낭만적인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해 놓은 것인데, 날씨가 좋지 않으니 이것마저 영 쓸쓸해 보입니다. 그저 하나하나 보며 '아,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사진들이 여기서 찍은 것이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날은 잔뜩 흐린데 해는 또 어찌나 긴지, 야경을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갈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경포대 끝자락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빗방울과 바람 때문에 몸이 으슬으슬 추웠거든요. 따뜻한 카페라테 한 잔에 챙겨간 노트북으로 하루동안 찍은 사진들을 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평일 오후, 흐린 날씨에 카페 역시 손님 없이 한가했습니다. 불운인지, 행운인 건지.
저녁 여덟시쯤 되니 밖이 어둑어둑해졌고, 카페를 나서 해변으로 가는 짧은 시간동안 바다가 시야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오래 기다린 강문 해변의 야경을 감상하기 위해 가방끈을 짧게 고쳐 메고, 삼각대에 카메라를 고정시켰습니다. 그나마 있던 몇 사람도 떠나고 한 없이 고요한 바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을씨년스럽기도 했지만 여유로움이 더 크게 느껴져 좋았습니다.
여덟 시가 넘어서야 강문 솟대 다리에 일제히 불이 켜졌습니다. 아치형태의 구조물 때문에 어딘가 만두나 송편 모양에 가까운 다리는 무지개빛으로 조명이 빛나는 것이 물안개 자욱한 해변에서 한결 더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저는 솟대다리의 전체 모습을 담을 수 있는 옆 다리로 건너가 야경을 감상했는데, 바로 아래 바닷물에 비친 반영도 근사하더군요.
흐린 날씨, 그리고 날씨 때문에 떠난 사람들로 이 날의 야경은 화려함보다는 신비로움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기다림과 그 동안의 기대엔 미치지 못했지만 강릉의 또 하나의 매력을 발견한 것 같아 돌아오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당일치기가 아니라 좀 여유가 있었다면 인적 드문 레인보우 브릿지에서 밤의 낭만을 한참 더 즐겼을 것 같아요. 물안개 자욱하게 핀 해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