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제주행을 준비하며 알게 된 것은 아닌척 해도 제가 여행 준비를 꽤 오래 그리고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딘가로 무척 떠나고 싶던 날, 아무래도 되도록 멀리 떠나고 싶었지만 해외 여행을 생각하니 준비가 막막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당장 떠날 수 있는 섬의 존재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던지요. 그날 밤 준비 없이 제주에 닿았습니다. 되도록 짐 없이 떠나고 싶었지만, 안그래도 홀로 떠나는 길 카메라까지 없으면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올림푸스 PEN-F와 12mm F2 단렌즈를 챙겼습니다. 제가 가진 카메라 중 가장 가벼운 여행용 조합입니다.
-제주, 훌쩍 떠나기 좋은 섬-
사실 제주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그다지 낭만적인 기억들도 아니고요. 회사를 다닐 때는 일로, 그 외에는 다른 곳을 가지 못해 선택한 곳이었습니다. 물론 제주 자체의 매력은 대단했지만 어디까지나 한적하고 그런대로 익숙한 옆 동네 놀이터 같은 느낌이었달까요.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그 섬에서 전에 없던 위로들을 받고 왔습니다. 돌아오고 나니 머리가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눈부신 봄만큼이야 못했지만 그래도 그 위로로 인해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제주 여행, 그래서 그 섬에서 PEN-F와 12mm F2 렌즈로 담은 장면들을 이곳에 기록해 두려 합니다.
변덕스러운 섬 날씨
길고 짧은 여행을 하며 느끼는 것이지만 섬날씨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섬에 도착한 밤, 온기를 기대했던 저를 외면하듯 제주에는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또 다음 날에도 비가 왔습니다. 잠시 화창해질만도 한데 개지도 않고 계속 비가 내리더군요. 기분탓인지 환영받지 못한 서운한 맘에 카페와 식당, 차 안에서 날씨를 원망했습니다. 그저 한가로이 바닷가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게 욕심이라는 것 같아서요.
비와 눈, 흐린 날씨까지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지만 궂은 날씨를 보며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이런 풍경이 이 섬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잠시 빗방울이 뜸해질 때 낮은 오름에 오르거나 바다가 보이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 시간을 보냈고, 작은 수첩에 별 의미 없는 말들을 떨어뜨리며 홀가분해지려 노력했습니다. 유난히 무거운 마음으로 머문 이 날들을 후에 어떻게 추억할지 모르겠지만, 사진으로 기록해두니 영영 잊을 일은 없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카메라마저 없으면 정말 외로웠을거예요.
-비가 그치기를, 슬픔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꼬르륵'
마음은 무겁고 머리는 복잡한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배가 고픕니다. 섬에 와서 밥을 먹고 딱히 하는 것도 없으니 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데, 그래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인지하면 그 후부터는 잠시 다른 모든 생각을 잊고 어떻게 배를 채울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근사한 한 상이든 혹은 평범한 국수 한 그릇이든 정신없이 삼키다 보면, 조금 전까지 세상이 두 쪽난 듯 고민하던 사람이 맞나 싶어 헛웃음이 나오곤 하죠. 제주에서의 위로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습니다. 적어도 하루 세 번 배가 고팠던 것, 근사한 음식에 눈이 팔려 카메라를 꺼낸 순간, 차 한 잔에 따뜻해진 몸이 절로 배시시 웃음을 지을 때 제가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떠나던 날, 감춰뒀던 선물을 펼친 그 섬
사실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충분히 느꼈을, 그런 일상의 위로들로 여행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섬을 끝까지 원망하진 않겠지만 다시 이 섬에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런 생각을 눈치 챘던지 돌아오던 날, 섬은 어제와 다른 곳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쯤 뜬 눈으로 숙소를 나섰을 때, 처음 이 섬에 왔던 그 계절처럼 화려하고 깨끗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고 저는 종일 시계를 보며 돌아갈 시간을 원망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날 하루는 원망이나 미움, 그리움 없이 그저 이 그림같은 섬에만 푹 빠져 보냈습니다. 늦었지만, 서울을 떠나며 제가 바랐던 그 위로였습니다.
-제주, 성산에서-
화창한 6월의 제주. 이 날 저는 서둘러서 이 섬을 최대한 많이 둘러보고 싶은 마음과 그저 이 한가로운 바다를 바라보며 섬이 건넨 위로를 만끽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짧은 고민을 했습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제가 볼 수 있는 이 섬의 조각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후에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오길 잘했다'고 혼잣말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꽤나 즐거웠는지 돌아와 열어보니 동영상도 하나 찍어뒀더군요. 그 날의 위로를 기록해 두고, 혹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공유합니다.
내 유일한 벗, 작은 사진기
이번 여행에서 언제나 함께한 것은 스마트폰과 카메라 둘뿐입니다. 혹시나 울릴 연락을 기대하고 혹 걱정하며 만지작거린 스마트폰이 미련의 상징이었다면, 카메라는 언젠가 다시 이 순간을 기억할 때 제 외로움과 고민을 친절하게 설명해 줄 벗이었죠. 아직 완전히 홀가분해지지 않은 오늘, 하지만 돌아와서 사진을 보며 한 번 더 말합니다. '다녀오길 잘했다'고.
짧은 여행 사진을 보며 저를 달래고 대화 상대가 되어준 벗, PEN-F와 12mm F2에 대한 소감을 짧게 정리합니다.
일상 카메라가 된 PEN-F의 장단점이야 이제 제법 잘 아는 것이 됐지만, 12mm F2 렌즈 하나만으로 담은 여행은 처음이라 렌즈의 장단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 렌즈의 왜곡 억제 능력. 12mm F2 렌즈는 35mm 환산 약 24mm 초점 거리를 갖는 광각 렌즈이고, 크기가 매우 작은 렌즈지만 고급 렌즈와 설계로 뛰어난 왜곡 억제력을 보입니다. 광각 렌즈를 사용하며 가장 우려되는 왜곡 문제를 해소해주기 때문에 훨씬 편한 12-40mm F2.8 PRO 줌렌즈를 탐내지 않습니다. 게다가 M.ZUIKO 프리미엄 렌즈군답게 해상력 역시 만족스럽습니다.
-100% 비교-
-좌,우 왜곡비교-
중앙부를 확대한 이미지에서는 PEN-F의 2000만 화소 이미지의 장점과 12mm F2 렌즈의 해상력을 엿볼 수 있고, 좌, 우 끝단을 확대한 비교에서는 광각 렌즈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키는 왜곡 억제 능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왜곡 없는 반듯한 이미지 특성은 시원한 12mm 광각을 걱정없이 즐길 수 있어 여행용으로 이 렌즈를 꼽는 가장 큰 장점입니다.
광각 렌즈지만 F2의 밝은 조리개 값을 활용해 얕은 심도 표현도 가능합니다. 위 이미지는 12mm F2 렌즈의 F2 최대 개방 이미지로 초점이 맞은 블럭의 코 부분과 뒷 배경의 대비가 뛰어납니다. 초점 부위는 매우 샤프하고, 배경은 보기 좋게 흐려집니다. 게다가 어두운 실내에서 개방 촬영이 갖는 셔터 속도 확보의 장점도 있어서 풍경 외에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최단 촬영 능력. 촬영 거리가 20cm로 매우 가깝고 광각 특유의 원근감까지 활용하면 재미있는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지나가는 달팽이를 찍은 이미지는 이 렌즈의 해상력과 근접 촬영 능력을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합니다. 풍경 몇 장을 담아올 요량으로 챙긴 광각 렌즈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어 다양한 감정으로 여행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 위로 그리고 기록
찰나와도 같았던 여행이 끝나고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일상이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섬이 건넨 위로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기며 이겨낼 생각입니다. 그래도 안되면 사진들을 다시 넘겨보며 털어내야겠죠. 아마도 그것을 알았기에 떠나는 순간 고민없이 카메라를 챙긴 것이 아니었을까요.
곧 괜찮아질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