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히 여행을 다니기 시작할부터는 서울은 늘 '탈출하고 싶은 도시'였습니다. 사람이 많고 건물이 재미없게 생겨서 흥미가 없었고, 물가가 비싸고 공기가 좋지 않아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 얼마 전부터는 아침마다 미세먼지 농도를 확인하고 외출을 결정해야 할 정도로 살기 힘든 곳이 됐죠. 그런데 얼마 전부터 서울에 산다는 것이 제 생각보다 꽤 멋진 일, 심지어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매일 아침 창 밖으로,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과 저녁놀 노을에 감동받게 되는 5월 날씨 때문인 것을 보니, 행복이라는 게 실상 그리 거창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 날 아침도 그랬습니다. 서울에선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던 5월의 화창한 하늘과 선명한 녹음, 그리고 간간히 불어오는 봄바람 때문에 설레어 어제같은 하루를 보내기 싫어 그길로 곧장 남산으로 향했습니다. 제가 여행을 시작한 후로, 그리고 어머니가 마스크를 챙겨 주시기 시작하면서 찾지 않던 곳입니다.
- N타워, 이게 얼마만인지! -
서울의 탁 트인 전경을 볼 수 있는 이 천혜의 전망대는 충무로역에서 버스만 타면 편하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 높게 솟은 N타워는 다른 도시에 있는 유명한 타워들과 비교하면 그리 내세울 것 없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서울을 떠올릴 때 누구나 기억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입니다. 때문에 남산은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로 손꼽힙니다. 뭐, 저도 외국인 친구가 서울에 오면 남산은 꼭 함께 갈 것 같긴 합니다. -다른 곳이 마땅히-
아침 열 시, 이제 막 하루 해가 화려한 빛을 내기 시작하던 시간에 N타워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산꼭대기에 세워진 팔각정과 언제나 전망대 난간을 덕지덕지 채운 사랑의 자물쇠 등 언제나와 같습니다. 새로운 풍경을 기대하기보단 기억 속 서울의 전경이 그림처럼 화창한 날씨에서 어떻게 보일까, 라는 상상을 하며 올라왔기에 익숙한 이 전망대 풍경이 반갑습니다.
평일 아침이라 전망대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습니다. 거기에 야외활동하기 좋은 5월을 맞아 현장 학습과 소풍을 나온 아이들과 학생들이 모여 유쾌한 장면들을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난생 처음 이 풍경을 보았을 여행자의 눈과 호기심 가득한 소년,소녀의 눈빛, 광합성에 신난 아이들의 웃음소리 등 이 날 전망대는 산 아래 빌딩숲과는 다른 세상 같았습니다. 소풍나온 아이들이 놓고 간 가방에서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아무렇게나 가방을 던지고 달려갔을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지어졌어요.
5월, 봄 그리고 서울.
떠올려 보면 이 도시가 가장 살만하다는 3월부터 5월의 봄에는 일이 몰리거나 다른 도시에 있어 서울의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남산 전망대에서 사방으로 트인 서울 전경을 내려다보니 알겠더군요. 서울에 삼십 년 넘게 살면서도 정작 이 도시가 이렇게 근사한지 몰랐다고. 그림처럼 화창한 날씨에 한강은 물론 실루엣으로 가늠할 수 있는 높은 빌딩들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기념 사진이나 몇 장 서둘러 찍고 돌아 나왔겠지만, 이날은 사진보다는 눈으로 더 오래 담았습니다.
여행자에게 역시 이 전망대는 서울을 기억하기 가장 좋은 곳이겠죠. 역시나 외국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있는 곳입니다. 연신 스마트폰과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환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요. 요즘에는 여행자의 시선에서 이 도시가 어떻게 보이고, 어떤 인상으로 남을지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데, 다른 때는 서울에 대해 그리 자부심이 없었지만 이 날만큼은 멋진 전경에 여행자들의 뒷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서울, 그래도 꽤 멋진 도시죠?'라면서요.
못보던 새 N타워 아래에는 통유리벽 사이를 걸으며 서울 전경을 좀 더 다양한 시선으로 즐길 수 있는 전망대가 생겼습니다. 그 길을 따라 식사와 티타임을 가질 수 있는 식당과 카페도 생겼고요. 한식 뷔페가 새로 입점한 것이 눈에 띄었는데, 제게는 '남산 위에서 무슨 한식 뷔페까지야' 싶지만, 외국 관광객에게는 늦은 오후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서울의 전경을 창 밖으로 감상하며 먹는 한국 음식들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겠습니다.
남산 전망대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머물다 내려온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날씨 하나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5월의 서울 풍경. 그동안 늘 바다 건너 도시들에 향해 있었던 시선을 오랜만에 내가 태어나고, 살고있는 이 도시로 돌려보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