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28mm의 선택은 옳았는가
LEICA Q Typ 116 | 28mm | F2.0 | 1/4000 | ISO 100
이것에 대해선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라이카 M과 SUMMICRON 35mm F2 ASPH 렌즈. 그렇게 꽤 오랜 기간 35mm 렌즈 하나로 모든 여행을 담았던 제게 28mm는 그동안 이만큼이나마 익힌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선고 같아 내심 걱정이 됐거든요. 떠나기 직전까지 계속된 고민 탓에 이 카메라와 가까워지기도 전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그동안 써 놓은 이야기를 덮고 새로 백지를 받아 든 듯 낯설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실제 이 렌즈는 많은 약점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여행의 감동을 단 하나의 시선만으로 담아야 한다는 원초적인 한계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카메라의 가벼움에 비해 렌즈가 그리 작지 못했고 28mm 광각 렌즈 특유의 주변부 왜곡도 미세하게나마 눈에 띄었습니다. 35mm 렌즈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사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라이카 Q의 28mm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새 펜'이 되어줬습니다. 35mm보다 가는 촉은 무엇을 그려도 힘이 없어 보였지만 갈수록 그 섬세한 터치와 특유의 세련미가 주는 감흥에 빠졌습니다. 그동안 사용하던 35mm SUMMICRON 렌즈가 진하고 투박하게 그려내는 콩테 같았다면 새로운 28mm SUMMILUX는 이제 막 깎은 뾰족한 연필처럼 섬세합니다. 그리고 넓어진 캔버스만큼 해야 할 일도, 생각해야 할 것도 많아졌습니다.
때문에 파인더 모서리까지 훑어가며 조금 더 신중하게 장면을 재단하는, 전에 없던 아슬아슬함이 생겼지만 그것이 자칫 자동초점이 앗아갈 뻔한 신중함을 붙잡아 줬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단순히 35mm에서 28mm로 시야가 넓어졌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SUMMICRON과 다른 SUMMILUX의 언어를 익히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 덕분에 28mm에 대한 선택은 ‘실패’에서 '일단 보류’로 그 평가를 미뤄놓을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썩 괜찮은 1500만 화소 카메라
35mm 텔레컨버터 활용 이미지
28mm 렌즈에 대한 제 우려를 덜어준 요소 중 하나로 이 카메라의 디지털 텔레컨버터 기능을 꼽습니다. 몇 년간 '35mm 렌즈가 곧 내 눈’이라며 제 시선을 규정지은 저는 이 기능 덕에 광각 렌즈에 대한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고 이 작지 않은 모험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라이카 Q의 텔레컨버터 기능
라이카 Q는 디지털 텔레컨버터 기능을 통해 35mm와 50mm 촬영을 지원합니다. 엄지손가락을 뻗어 닿는 위치에 작은 버튼으로 28/35/50mm를 전환하게 되며 화면과 뷰파인더에 가이드라인이 표시됩니다. 하지만 실제 줌이 되는 것은 아니고 해당 초점거리에 맞게 28mm 원본 이미지를 ‘잘라내는’ 방식입니다. 때문에 35mm는 약 1500만 화소, 50mm는 약 800만 화소로 이미지 크기가 작아집니다.
28 mm 이미지
35 / 50mm 디지털 텔레컨버터 활용 이미지
화소가 줄어들고 심도 표현에서 손해를 보지만 해상력과 발색 등 기본적인 화질에는 손실이 없기 때문에 라이카 Q 하나를 2400만 화소의 28mm 카메라, 1500만 화소의 35mm 카메라, 800만 화소의 50mm 카메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디지털 텔레컨버터 기능의 장점입니다. 물론 실제 렌즈를 교환한 것에 비할 수 없지만 끝까지 28mm 렌즈가 마음에 걸렸던 제게는 작게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 정 안되면 1500만 화소 35mm 카메라로 사용하면 되지 뭐’라면서요. 재미있는 것은 정작 이 카메라를 사용한 후로는 28mm의 매력에 빠져 이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텔레컨버터 촬영 영역 표시
디지털 텔레컨버터를 사용하며 특별히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이미지 보정을 위해 라이트룸으로 불러왔을 때에도 설정에 따라 35/50mm 촬영 영역으로 표시된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제법 세 개의 렌즈를 활용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크기 조정을 선택하면 숨겨졌던 주변부를 다시 끌어넣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완성도 높은 기능을 활용하기 위해선 무압축 RAW 촬영이 필수입니다.
단 한 장면으로 증명된 자동초점의 가치
LEICA Q Typ 116 | 28mm | F2.0 | 1/640 | ISO 100
한 손만으로도 촬영이 가능한, 자동초점 카메라는 근본적인 것을 바꿨습니다. 셔터를 누르기까지의 시간이 짧아졌고, 그만큼 잦아졌습니다. 초점 링을 돌리던 왼손은 제법 맘에 든 취미를 잃었고 셔터나 간간히 누르던 오른손이 이래저래 바빠졌습니다. 하지만 역시 카메라가 빠르게 초점을 맞춰 준다는 것은 너무나도 편한 일입니다. 최신 디지털카메라에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한동안 잊고 지낸 것이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자동'이 수동보다 편하다는 것을 반박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게다가 라이카 Q처럼 빠르고 정확하다면 수동 초점은 믹서기를 옆에 두고 강판에 토마토를 가는 것처럼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오랜만에 정말 편하게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보다 가벼운 셔터를 날렸습니다.
고집인지 미련인지 몰라도 아직 저는 라이카 Q의 자동 초점이 M의 수동 초점보다 더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행 중 기계보다 나를 신뢰해야 하는 순간이 분명 찾아오는데다 잘 만들어진 기계의 아름다움 역시 과거로 보내기엔 아직 너무 아쉽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돌아보니 분명 라이카 Q가 아니었으면 이토록 깊지 못했을 몇몇 장면이 눈에 띕니다. 그리고 몇몇 분들에게 라이카 Q는 결정적 한 장면으로 자동 초점의 가치를 입증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이것을 새로운 시대의 전통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이 카메라는 적지 않은 단점에도 언젠가 쟁쟁한 라이카의 역사에서 분명히 작게나마 언급되리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1954년의 M3에 출발점을 두고 조금씩 변화를 꾀하고 있는 라이카 M과 달리 라이카 Q는 지금 우리가 있는 시대에서 이제는 낡아버린 전통, 먼지 앉은 가치들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고집을 비우고 ‘본질’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린 이 카메라는 이전의 것들과 공통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낯설지만 함께한 여행 속 결과물만큼은 걸음과 시선이라는 제목 아래 영락없이 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종이와 펜이지만 변함없이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사실 제가 이 카메라를 이토록 좋아하게 될 줄은 불과 두 달 전까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때쯤 분명히 제가 했어야 할 선택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떠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여행의 묘미와 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분모가 마음에 들어 앞으로 당분간은 이 카메라와 함께 여행을 하려 합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이 새로 쓰인 본질에 대해, 보다 확신에 차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fin,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