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전엔 쉬이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지만, 한 번 경험하면 다음부턴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지갑을 열게 된다는 그 물건, 에어팟 시리즈입니다. 애플 에어팟이 출시된 지 벌써 4년, 첫 발표 후 콩나물과 귀에 꽂은 담배 꽁초에 비교될 때는 이렇게 큰 성공을 할 것이라 예상한 이가 많지 않았죠. 지금은 그야말로 전세계적인 '인싸템'이 되었습니다. 저도 1,2세대를 모두 구매했고 이제는 종종 아이팟 클래식으로 옛 음악을 감상할 때가 아니면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지 않게 됐죠.
하지만 작년에 발매된 에어팟 프로는 또 한 번 구매를 망설이게 했습니다. 물론 이번엔 디자인이나 성능,편의성에 대한 의구심은 아니었고 순전히 '가격' 때문이었어요. -좋은 걸 누가 몰라-
노이즈 캔슬링과 기타 몇몇 편의 장치가 추가됐지만 정가 기준 30만원이 넘는 가격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사용 중인 2세대 에어팟의 1세대 대비 향상점인 기기간 전환 속도 향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거든요. 그래서 구매할 생각이 없었지만 올 초 런던 여행을 떠나기 전 기내 소음을 핑계로 에어팟 프로를 구매했습니다. 이게 벌써 6개월 전 이야기입니다.
사실 애플 제품의 패키징은 수 년간 크게 다를 것이 없고, 이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할 정도지만 그럼에도 하얀 자태가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카메라가 준비될 때까지 비닐도 뜯기 싫게 만드는 매력이 있어요. 에어팟 프로의 패키지는 전면에 실제 크기의 제품 이미지가 인쇄돼 있는 것이 전부. 하지만 이 이미지만으로도 기존 에어팟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존 에어팟 케이스와 달리 에어팟 프로의 충전 케이스는 가로로 긴 형태입니다. 소재는 동일하고요. 상태를 표시하는 LED가 전면에 배치돼 있습니다.
아, 많이들 모르시던데 에어팟과 에어팟 프로 모두 충전 케이블이 기본 구성품에 포함돼 있습니다. 본체를 감싸고 있는 종이를 들어내면 나오기 때문에 모르고 상자를 보관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에어팟 1,2세대는 USB A-라이트닝 케이블이 제공되는 것과 달리 에어팟 프로에는 USB C-라이트닝 케이블이 제공됩니다.
곧 긁히고 더럽혀지겠지만 이 순간의 아름다움 때문에 애플의 화이트를 욕할 수가 없어요. 케이스를 통해 보관과 충전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은 같지만 에어팟을 넣는 방향이 달라서 처음엔 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실물 디자인은 구매하기 전 보았지만 내것이 되니 좀 더 상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에어팟과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인이어 이어폰 형태라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실리콘 팁이 기본 제공되고, 콩나물에 빗대게 만든 유닛 하단부는 에어팟보다 짧아졌습니다. 본체를 두드리는 터치 컨트롤이 아닌 압력을 이용해 누르는 컨트롤을 위해 손이 닿는 부분에 미세한 홈이 있습니다. 손을 올리기 편하도록요.
케이스를 열어 아이폰 근처에 가져가면 연결 메시지가 표시되는 방법은 기존 시리즈와 같습니다. 참 편하죠. 사용하기에도, 그리고 도난 당하기도. 에어팟 시리즈는 내 기기에 연결된 상태에서도 다른 아이폰 근처에 가져가면 새로 연결이 나오는데, 분실/도난에 취약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연결이 간편한 것은 환영입니다. 요즘에야 블루투스 기반 무선 제품을 많이 사용하셔서 페어링 과정에 어려움을 느끼는 분이 줄었지만, 기기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분은 블루투스 메뉴에 진입해 페어링하는 것보다 이렇게 직관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제품에서 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오픈형 이어폰이었던 에어팟 1,2세대와 달리 인이어 형태로 제작된 제품이라 연결 과정에 몇 단계가 추가됐습니다. 실리콘 팁이 귀 안에 제대로 밀착되는지, 사이즈가 귀에 맞는지 테스트하는 과정입니다. 사이즈별로 총 세 가지 실리콘 이어팁이 제공되는데, 이 테스트를 거치면서 귀에 맞는 팁으로 교체하시면 됩니다. 지극히 평범한 저는 기본 장착돼 있는 M 사이즈로 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비교적 간단히 연결 완료.
다음은 기대했던 노이즈 캔슬링 테스트를 해 보았습니다. 제어 센터의 볼륨 조절 바를 길게 누르면 세 가지 모드를 아래에서 선택할 수 있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모드와 주변음 듣기 모드가 여기 있습니다. 노이즈 캔슬링을 켜는 순간 주변 소음이 줄어들며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이 낯선 차음 환경에 답답함을 느끼거나 더러 멀미를 느끼는 분도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어팟과 달리 에어팟 프로 전에는 미리 청음을 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대했던 노이즈 캔슬링의 성능은 만족스러웠습니다. 이전에 잠시 경험해 본 보스 이어폰/헤드폰보다는 주변 소음 제거 성능 자체는 부족하게 느껴졌지만 ON/OFF를 반복하면 노이즈 캔슬링 기능의 존재가 음악 감상과 출퇴근 대중교통에서의 안락함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30만원이 아깝다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됩니다. -이미 돈은 내버렸고-
에어팟 프로를 산 목적이자 핑계였던 런던행 비행에서 노이즈 캔슬링은 그야말로 제몫을 했습니다. 비행기 기내 소음같은 규칙적인 소음은 노이즈 캔슬링이 힘을 발휘하기 가장 좋은 환경이기에 예상했던 결과지만 장시간 비행에서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니 같은 이코노미석도 좀 더 안락하게 느껴졌습니다. 열 시간 넘는 비행이라 중간에 배터리를 충전해 줘야 했는데, 귀에서 에어팟을 빼는 순간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소음 때문에 빼기가 정말 싫더군요.
에어팟 2세대에서도 느꼈지만 기기간 전환 속도도 만족스러운 수준입니다. 저는 아이폰/아이패드/아이맥/맥북을 번갈아가며 작업을 하는데 1세대는 10초 가량이 걸렸거든요. 물론 다음 세대에선 더 빨라질 것이지만 현재도 충분히 괜찮습니다. 맥에선 가끔 연결이 안 될 때가 있지만. 아, 그리고 노이즈 캔슬링이 맥 작업때도 적용돼 집에서 조용히 작업하고 싶을 때 유용합니다. -또는 밖에서 공사 중이거나-
기억을 더듬어 쓴 개봉기는 여기까지. 보통 제 손에 들어온 기기가 6개월을 버틴 경우가 많지 않은데 에어팟 시리즈는 대안이 많지 않아 배터리 성능이 떨어지고 고장이 날 때까지 사용하는 편입니다. 에어팟 프로 역시 지금도 매일 사용하고 있고요.
앞으로 차근차근 6개월간 사용하며 느낀 장단점과 특징을 정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