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힘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는 것에 기뻐한 게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출근길에 두툼한 외투를 챙겨 입어야 할만큼 날이 차가워졌고, 골목에는 떨어진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습니다. 가을, 그리고 11월의 끝자락. 이대로 보내면 안되겠다 싶어 지난 한 주간은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일상을 틈틈이 기록해 보았습니다. 매일 출퇴근하는 회사원의 일상이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더군요.
제가 가지고 있는 올림푸스 카메라 E-M1 Mark II과 E-M1X를 번갈아가면서 사용했어요. 출퇴근 하는 날엔 작고 가벼운 E-M1 Mark II를, 동네 나들이나 공원을 산책할 땐 E-M1X를 가방처럼 메고 다녔고요. 두 카메라는 외형과 휴대성에 차이가 제법 있지만 이미지 성향은 매우 비슷해서 어느 카메라를 쓰더라도 제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렌즈는 12-40mm F2.8 PRO와 25mm F1.2 PRO를 사용했어요. 이 둘만 있으면 사실 못 찍을 사진이 없습니다.
좋은 소식
돌이켜보면 가을에는 유독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두 권의 책 계약이 모두 가을이었고, 이런 저런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고 운 좋은 선물들도 받았고요. 2019년 가을의 좋은 소식은 MBC <박경의 꿈꾸는 라디오>의 코너를 맡게 된 것과 강북구 사이버 사진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시상식이 있어 다녀왔습니다.
4년 전 우연히 알게 된 사진 공모전에서 우수상에 입상한 것을 어머니가 특히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매년 '올해는 사진 공모전 소식 없다니'라고 물어보셨는데, 매해 미루다 출품 마지막 날 급하게 제출한 사진 중 하나가 운 좋게 최우수에 당선됐습니다. 입선 정도가 목표였던 터라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죠. 어머니께 자랑도 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북서울 꿈의 숲에서 촬영한 이 사진은 공원 내 팔각정 안에서 바라본 풍경이 아름다워 팔각정 내부 장식을 프레임처럼 구성한 사진입니다. 다른 분들의 사진이 겨울철 산행, 야간 행사 등 고생을 많이 하신 것에 비해 저는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다 찍은 사진이라 내심 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특이한 구성을 많은 분들이 좋게 봐 주신 것 같습니다.
시상식 현장에 가니 사진을 디아섹 액자로 크게 만들어 전시해 놓았더군요. 유광 프레임에 인쇄된 사진은 컬러나 디테일이 모니터, 종이로 볼 때보다 훨씬 좋아서 맘에 쏙 들었습니다. 전시 끝나고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요.
일 년에 한 번 진행되는 강북구 사진 공모전은 매해 수준이 높아지는 것 같아요. 시상식이 끝나고 다른 작품들도 둘러 보았는데 집에 걸어놓고 싶을만큼 멋진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내년에도 참석해서 보고 싶어요.
이 날 시상식에서 최우수 상장과 상금 백만원을 받았습니다. 좋은 기회로 생긴 큰 돈은 부모님 용돈과 조카 선물, 그리고 주변의 좋은 이들과 맛있게 식사하는 것으로 벌써 바닥이 났지만 멋진 가을 선물을 많은 분들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멀리까지 삼촌 응원하러 온 조카의 앙증맞은 손이 백만원보다 더 소중했던 날이었어요.
연말 모임
11월도 중순이 넘어가니 그간 연락이 없던 이들과도 연말을 핑계로 약속을 잡고 자리를 갖게 됩니다. 이날은 두 달 전부터 미뤄 온 지인과 저녁을 먹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오면서 신세를 많이 졌는데 그간 제대로 보답한 적이 없어 연말과 사진공모전 상금 등을 핑계로 자리를 만들었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 몰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양갈비집 이치류로 안내했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양갈비를 한 번씩 먹으러 가는데 가격은 좀 있어도 먹다보면 이런 게 돈 버는 즐거움이고, 사는 행복이다 싶습니다. 네 명이었던 모임 인원이 사정상 두 명으로 줄었지만, 그만큼 둘이 넉넉하게 먹고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기를 먹는 동안엔 먹는 데 집중하느라 대화가 많지 않았지만요.
이치류는 홍대 본점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인데, 전에 없던 양설이 새로 생겼더군요. 궁금하긴 했지만 우설도 그리 즐기지 않는 터라 전에 추천받았던 대로 살치, 등심, 갈비를 각각 1인분씩 주문했습니다. 두 분이서 드시기에 좋은 구성이라고 하더라고요. 순서는 양고기 냄새가 덜한 살치살로 시작해 담백한 등심, 향이 강하고 지방이 많은 갈비로 마무리하게 됩니다. 보통은 양고기에 맥주를 마시지만 이날은 하이볼이 눈에 들어와서 마셨는데 진저 하이볼이 상당히 잘 어울리더라고요.
거기에 고시히카리 쌀로 지은 밥과 양갈비의 조합은 시간을 계속 되돌려 반복시키고 싶을만큼 좋습니다. 아무래도 겨울 중 송년회 핑계로 한 번 더 방문해야겠어요. 그때는 양갈비만 배부르게 먹어보려고요.
가을 풍경
주말엔 동네 산책을 했습니다. 평일엔 회사, 주말엔 개인 업무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제대로 된 가을 나들이도 못 하고 가을이 지나가겠더군요. 집 가까이에 4.19 국립묘지가 있고 주변으로 카페 거리도 조성돼 있어 산책 겸 걸어다녀왔어요. 마침 날도 많이 풀리고 가을색도 절정으로 물들어 즐거운 오후였습니다.
30년 넘게 이 동네에 살면서도 생소한 골목길이 많더라고요. 그 중에서도 30여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 낡은 간판과 건물이 자리잡은 길, 재래시장 그리고 그 위로 쌓인 낙엽들이 마음에 들어서 중간중간 멈춰 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늘 해외의 어떤 도시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멋진 곳들이 있는 걸 보면 시야를 조금 더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내심 '내년 강북구 사진 공모전'을 생각하기도 했고요.
가을빛이 완연했고, 노을이 멋진 날이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2019년 가을을 이렇게 즐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글을 쓰는 일요일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게 내일부터 겨울이 될 것만 같아서요.
겨울 준비
겨울 준비랍시고 난생 처음 연포탕을 먹어 보았습니다. 이날도 한 턱 쏘겠다며 제가 데리고 간 곳인데, 평소 해물을 잘 먹지 않는데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먹다보니 바다사나이 아버지, 낙지 좋아하는 어머니 생각이 나더군요. 다음에 가족들이랑 다시 와야겠어요.
추위를 타지 않지만 올겨울엔 왠지 단단히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아 미리 준비를 했어요. 평년보다 춥지는 않다고 하는데, 매서웠던 러시아 여행이 요즘 부쩍 생각나서 그랬던 걸까요.
4.19 국립 묘지 앞에 생긴 카페 멘디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일주일을 마무리합니다. 이전에 사진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을 개조한 카페라는데, 2층 가정집같은 외형이 포근하고 내부 인테리어도 소박하고 깔끔하게 잘 해놓아서 마음에 들었어요. 앞으로 주말에 여유와 생각이 필요할 때 종종 오려고요.
바빴지만 틈 나는대로 한 컷 한 컷 기록한 일주일의 사진 일기입니다. 자칫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을 이렇게 남겨두니 좋아요. 여러분도 여유가 된다면 카메라 챙겨 다니면서, 아니면 스마트폰 카메라라도 좋으니 2019년 가을의 모습들을 기록하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