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다 봄이 조금 더 일찍 오는 교토와 고베의 풍경을 담아 왔습니다. 아직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공기에 봉오리가 아직 쉬 꽃망울을 터뜨리지 못하는 서울과 달리 교토와 고베의 거리 곳곳에는 이미 붉고 노란 꽃이 가득했고, 공기에선 봄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십년만에 다시 걷고 바라보는 풍경들이 눈물날 만큼 정겨웠고요. 제가 사는 도시에도 봄이 어서 와 닿기를 바라며, 교토와 고베에서 담은 사진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가벼운 여행은 최대한 짐을 줄여야 마음까지 홀가분해집니다. 마음 먹고 떠나는 출사(?)는 두,세대의 카메라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렌즈들을 가방에 짊어지고 가지만 훌쩍 떠날 때는 가벼운 카메라와 렌즈 하나만 보조 가방에 넣습니다. 최근 몇 년간 그 역할은 올림푸스 PEN-F가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PEN-F와 컴팩트 단렌즈 17mm F1.8, 12mm F2만 챙겼고요.
산노미야
고베는 십 년만입니다. 아마도 첫 번째 해외 여행이었고, 지금은 매일처럼 찍는 사진에 막 재미를 붙인 시기였습니다. 산노미야라는 이름을 보니 커다란 구식 DSLR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땀 뻘뻘 흘리며 다녔던 십 년 전 여름이 거짓말처럼 떠올랐습니다. 그 시절 역 모습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도 '여긴 그대로네'라는 생각이 드니 재미있습니다. 미세먼지로 고생하는 서울 사람들과 달리 고베의 3월 공기는 맑고 상쾌했습니다.
공기
비행기로 몇 시간 되지 않는 거리지만 역대 최악의 미세 먼지에 시달리는 서울과 달리 이곳은 너무나도 맑고 화창했습니다. 기온까지 훨씬 포근하니 계절을 하나 건너온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전망대에서 고베 시내를 바라보니 고층 빌딩 어지럽게 솟은 스카이 라인이 서울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면서도 곳곳에 이 도시만의 정취가 눈에 띄더군요. 게다가 저 멀리 그리워하던 고베 타워까지. 빠듯한 일정을 쪼개 한 시간 반 거리의 고베까지 오는 것을 망설였지만 화창한 날씨와 그리웠던 도시의 풍경을 보니 잘했다 싶었습니다.
봄빛깔
서울에선 아직 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나라의 도시니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교토는 이미 이런저런 꽃과 풀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교토에서 가장 먼저 매화가 핀다는 정원을 찾았는데, 마치 땅에서 피어오른 듯한 붉은 동백꽃들과 새까만 나무 실루엣 너머로 보이는 분홍빛 매화가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더군요. 달려가면 애니메이션 속 장면이 펼쳐질 것만 같은, 일본에서 본 장면 중 가장 근사한 풍경이었습니다.
고인 물에 꽃잎 가득 떠 있는 장면에서도 봄이 물씬 풍겨옵니다. 사실 추운 날씨를 좋아해서 겨울이 가는 걸 늘 아쉬워하는데, 올해는 유독 봄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미리 봄을 느끼러 떠나기도 했고요.
후시미 이나리 신사
영화 게이샤의 추억으로 유명한 교토 후시미 이나리 신사. 첫 교토 방문때는 이런 멋진 곳이 있는줄도 모르고 기요미즈데라 앞 모찌 가게에서 시식만 하고 돌아온 것을 내내 후회했습니다. 가까워서 금방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십 년이 걸렸군요. 교토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이나리 신을 섬기는 신사로 일본전역에 퍼져있는 약 3만개의 이나리신사 중 본점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토리이를 보러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포토 스팟으로도 인기가 있는 곳이라 새벽 네시 해가 뜨기 전부터 포토그래퍼들이 텅 빈 토리이 길을 담는 데 열중이라고 하네요.
저도 영화와 사진에서 보던 장면을 실제로 볼 생각에 설렜지만 여느 유명 관광지가 그렇듯 이곳 역시 관광객 인파가 어마어마해서 원하던 그림을 담기는 어려웠습니다. 꽤 긴 길을 안쪽까지 걸어 들어가면 인적이 드물다지만 다시 돌아오는 게 일이니까요. 그래도 언젠가 꼭 한 번 보고싶던 후시미 이나리 신사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먹거리
일본에 자주 가는 이유를 물으면 '가까워서'보다 '맛있는 게 많아서'라는 답이 먼저 나옵니다. 사랑하는 돈코츠 라멘을 포함해 일본 음식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일본 여행 일정이 결정되면 하루 세끼를 뭘 먹을지부터 결정하게 됩니다. 늘 관광지보다 식당 검색이 앞서고요. 막상 여행 중에는 거리 풍경에 사람들의 표정, 쇼핑에 빠져 끼니를 거르기 일쑤지만 그래도 일본은 여전히 '식도락'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입니다.
음식 말고도 디저트가 정말 맛있죠. 특히 어느 동네에 가던 수준 높은 빵과 케이크, 커피를 맛볼 수 있어 좋습니다. 이번에도 동네 유명한 빵집, 현지인이 추천하는 디저트 가게, 우연히 발견한 분위기 좋은 카페 등을 찾아 다녔습니다. 언젠가 이 동네가 내 옆동네처럼 익숙해지면 관광지 말고 카페와 디저트 숍들만 돌아 다니며 지도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스타벅스
좋은 카페와 베이커리 많은데 왜 꼭 스타벅스를 한 번씩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스타벅스라면 사족을 못 쓰는 친구에게 전염된 것일까요. 그래도 고베에 있는 스타벅스가 흔히 보는 곳과 달리 외관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근사해서 다행입니다. 요즘엔 도시 분위기에 맞춰 컨셉 스토어로 꾸며진 스타벅스를 골라 다니는 여행객들도 많다고 하죠. 제게 스타벅스는 일정이 바쁠 때 잠시 아이스 커피를 놓고 한 숨 돌리는 휴게소같은 곳입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도 '스타벅스에 있다'고 생각하면 동네 카페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묘하게 놓이거든요.
고베 야경
십 년만에 다시 마주한 고베 야경은 여전합니다. 고베타워 왼쪽에 지어진 신식 건물은 십 년 전엔 없었던 것 같지만, 고베타워와 그 주변 풍경은 그대로입니다. 사진 찍는 것에 막 재미를 붙인 그 때는 삼각대고 장노출 촬영이고 타임랩스 동영상이고 몰라서 그냥 셔터만 수백 번 눌렀는데, 그새 뭐 좀 배웠다고 삼각대를 세우고 야경을 담습니다. 셔터가 열려있는 동안, 그리고 타임 랩스 촬영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십 년간 얻고 잃은 것들, 변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떠오릅니다. 늘 새로운 도시를 꿈꾸지만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날 고베 야경을 장노출 사진과 타임랩스 동영상으로 담는 동안 한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서울에도 곧 봄이 오겠죠
서울에 돌아오니 계절은 다시 봄이 오기 전으로 돌아갔습니다. 패딩 점퍼를 다시 껴입어야 했고, 미세 먼지를 막을 마스크를 챙겨야 했습니다. 그래도 봄이 조금씩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왔으니,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하루하루 꾹꾹 눌러 담으며 봄 맞을 준비를 해야겠어요. 당장 이번 주말에는 이불과 옷 정리를 하고, 새로운 모임도 참석해 사람들도 만나 보려고 합니다. 2019년 봄은 제게도, 여러분들에게도 근 10년 중 가장 멋진 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멋진 봄 여행과, 근사한 장면도 얻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