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제주 나들이를 다녀왔습니다. 평소처럼 친구 녀석과 차를 마시다 문득 나온 '제주나 다녀올까'라는 말을 시작으로 약 일주일만에 항공과 숙소, 대강의 일정까지 끝난 나름 급 나들이였습니다.
별 다른 계획은 없었고, 힘든 여름 끝에 온 가을을 멋진 곳에서 여유롭게 맞아보자는 것이었죠. 시간은 사흘, 출발하기 전엔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녀와서 사진을 보니 아쉬움이 큽니다.
9월의 제주는 가을이 한창이었고, 여행하기 좋았습니다. 내년에도 이맘때쯤 다시 생각날 것 같습니다.
- 제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
미러리스 카메라 올림푸스 PEN-F & 초광각 렌즈 M.ZUIKO DIGITAL ED 7-14mm F2.8 PRO
이번 여행에는 올림푸스의 초광각 렌즈 M.ZUIKO DIGITAL ED 7-14mm F2.8 PRO를 챙겼습니다. 대부분의 여행을 작고 가벼운 단렌즈로 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광활한 제주의 풍경을 가능한 한 넓게 담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올림푸스 PRO 렌즈와 PEN-F의 조합을 테스트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카메라는 늘 사용하는 PEN-F를 챙겼는데, 개인적으로 PRO 렌즈들과는 디자인이며 무게 중심 등 전반적인 조화가 아쉽지만 그래도 손에 익은 카메라가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안겨줄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물론 OM-D E-M1 Mark II가 아니면 PRO 렌즈군을 온전히 활용하기 어려운 점은 아쉽습니다.
제주 이호테우 해변
제주에서의 첫 날은 여름처럼 더웠습니다.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초가을 더위에 새삼 이 섬이 '남쪽 나라'라는 것을 실감하게 됐죠. 하지만 하늘과 햇살은 영락없이 가을의 그것이라 차를 타고 해안 도로를 달리기만 해도 신이 났습니다. 가볍게 점심을 먹고 향한 곳은 공항에서 멀지 않은 이호테우 해변. 독특한 말 모양의 등대가 있어 일몰 즈음에 가 보고 싶었던 곳인데, 이런 날씨라면 낮에도 근사할 것 같아 차를 세웠습니다. 해변에 들어서자 마자 눈에 띈 것은 계곡처럼 맑고 투명한 바닷물.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해수욕장은 저멀리 보이는 등대를 따라 걸으면 한 시간쯤 훌쩍 지나는 멋진 산책로이기도 했습니다.
- 부두길을 따라 걸으면 닿을 수 있는 빨간 말 등대 -
- 그 건너편으로 보이는 하얀 말 등대 -
파란 하늘, 바다와 대비되는 빨간색과 흰색의 등대는 머릿속에 '이호테우'라는 이름을 각인 시키는 풍경으로 남았습니다. 해 질 때 즈음 다시 오자는 약속은 부산한 일정 때문에 지키지 못했지만 한 시간 넘게 모래사장과 부두길을 걸으며 누린 간만의 여유는 새벽잠을 자고 집을 나서 이 섬까지 날아 온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날 못 본 노을 지는 풍경은 다음에 와서 보면 되지, 라며 다음 여행을 기약합니다.
제주는 가을, 여기는 봄날.
-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티 타임 -
숙소에 짐을 풀기 전 친구가 가 보자고 한 이 카페는 워낙에 유명한 곳이지만 두 사람 모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애월에 들어서자마자 늘어난 차들, 그리고 카페로 진입하는 골목길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며 인기를 실감했습니다. 처음엔 작은 카페가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시작한 이 곳은 이제 실내외 다양한 뷰를 자랑하는 바닷가 카페가 됐더군요. 주문을 하지 않고는 입장도 할 수 없는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도, 그게 아니었다면 인파에 치여 저 같은 사람은 구경조차 하기 쉽지 않겠다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들어서자 마자 사람숲을 뚫고 가장 끝, 바다가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습니다. 해가 뜨거운 날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아마도 예전엔 게스트 하우스에 묵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었을 실내 공간들도 잠시 살펴보았지만, 역시 이 곳은 탁 트인 야외에서 이 섬에선 너무나도 흔한 바다를 평범한 맛의 커피와 함께 즐기는 것이 제격입니다. 커피 한 잔 들고 실내도 야외도 아닌 공간들을 걸으며 눈에 담고 사진을 찍는 것이 이 곳만의 다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명절 전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역시나 제주는 제주인지라 그림자 하나 없는 테이블을 빼면 엉덩이 내려 놓을 자리조차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바다 실컷 보려 찾은 섬에서 바다를 보고, 또 바다를 보며 차를 마셨으니 벌써 목표를 절반쯤은 이룬 것 같았습니다.
해 지는 바닷가 풍경
2박 3일이니 단 두 번, 그마저도 날씨에 따라 다 볼 수 있을지 모를 석양은 무척 소중해서 어디서 바라볼 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첫 날은 이호테우 해변에서 말 등대 뒤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싶었지만, 계획이 바뀌어 신창 해안도로로 향했습니다. 바다에 서 있는 커다란 풍차가 볼거리라는 곳인데, 어찌나 큰지 멀리서부터 어렵지 않게 보여서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싶었을 때 차를 세웠습니다. 작은 등대가 있는 부두길이 낚시꾼 말고는 사람도 몇 없어서 여유롭게 파도 소리를 듣고, 석양을 담기에 더 없이 좋았습니다.
- 신창 풍차 해안도로의 야경 -
일몰 시간을 앞 둔 여섯시 즈음부터 바다가 암흑에 잠긴 여덟시까지 두어 시간동안 화창한 가을날의 석양을 즐겼습니다. 사진과 동영상, 타임랩스 촬영으로 다양하게 담으면서요.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을 광활한 담아 준 7mm 초광각 렌즈를 챙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머리 해안
제주 서쪽에 솟은 커다란 산방산에서 해안가로 뻗어나가는 형태의 용머리 해안은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 외국 유명 지질 공원의 사진에서나 보았던 수많은 퇴적층을 볼 수 있습니다. 수 년 전 제주를 찾았을 때 용머리 해안 입구까지 온 적이 있지만 비행기 시간에 쫓겨 둘러보지는 못했는데요, 이번에 둘러 보니 입장료 2000원에 이 정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더군요. 여름같은 더위가 기승을 부린 첫 날과 달리 둘째 날은 하루만에 가을이 된 듯 서늘하고 비도 추적추적 내렸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관광이었습니다.
- 용머리 해안과 산방산의 전경 -
비오토피아의 수(水)∙풍(風)∙석(石)박물관
- 비오토피아의 석(石) 박물관 -
한 시간 관람에 15000원의 관람료. 셔틀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제한적인 관람. 평소 같았으면 상세 정보를 보지도 않았겠지만 마침 TV 프로그램에서 건축가 이타미 준의 이름을 듣고 지난 번 방문 때 본 방주 교회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제주에 있다는 그의 건축물들을 좀 더 보고 싶다고 생각했고요. 관람 시간이 가까워지자 더 거세진 비에 관람 환경은 좋지 못했지만 물과 바람, 돌을 주제로 한 세 곳의 전시실은 건축물 자체의 아름다움과 그 안에 담긴 철학을 엿보는 즐거움이 대단했습니다. 다녀온 뒤 건축에 관심이 많은 지인에게 곧장 언젠가 맑은 날 꼭 함께 가 보자고 메시지를 했을 정도로요.
개인적으로 비오토피아는 다음 제주 여행때 꼭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입니다. 물론 그 때는 날씨가 화창해서 이 건축물의 진가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앤트러사이트 한림점
입에 맞는 라떼를 발견하는 것은 몸에 꼭 맞는 옷을 발견하는 것 만큼이나 즐거운 일입니다. 저는 합정에 있는 앤트러사이트의 카페 라떼를 좋아하는데, 제주에서 가 볼만한 카페를 찾던 중에 제주 한림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침 숙소랑 무척 가까웠고요.
비수기를 맞아 잠시 영업을 중단한 보말죽 집 입구에서 헛걸음을 한 뒤 일찌감치 카페에 도착해 오픈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첫 손님으로 들어서 카페 라때와 아침 요기를 할 파운드 케이크를 주문했습니다.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아, 이거다.' 싶더군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생겼고, 창고를 개조했다는 독특한 실내 인테리어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구석구석 훑어 보았습니다. 숙소가 멀지 않다면 앤트러사이트 한림점은 제주에서 가 볼 만한 카페를 찾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곳입니다.
제주 이호테우 해변
- 새별오름 나홀로 나무 -
돌아오는 날에도 내내 비가 왔습니다. 어디든 비를 몰고 다닌다는 사람들의 농을 웃으며 넘기고 공항으로 가기 전에 찾은 곳은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새별 오름의 나홀로 나무. 너른 벌판에 홀로 솟은 한 그루 나무가 감성적인 장면을 만들어 준다는 추천을 익히 듣기도 했거니와 자욱한 안개를 보니 절로 그 풍경이 기대가 되더군요. 비 오는 날씨에 외딴 곳임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사진을 담았습니다. 그들이 가고 난 뒤, 기다림 끝에 사람 없는 외톨이 나무를 마주하고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이럴 장면에 제격인 것이 PEN-F의 모노크롬 프로파일. 안개와 비 때문에 만물의 색이 흐렸지만 흑백 사진에선 오히려 더 아련하고 운치있게 담깁니다.
이곳도 다음에 날씨 좋을 때 한 번 더 찾고 싶습니다.
사흘간의 짧은 제주 나들이는 평소보다 가볍고 여유로웠습니다. 아마도 이전 여행들은 무엇엔가에 지쳐서 도망치듯 날아왔거나 혹은 일에 쫓겨 제대로 주변을 둘러 볼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억해 봅니다.
가벼운 카메라 하나 목에 매고 여름과 가을을 넘나 들었던 제주에서의 시간은 이제 다음 여행까지 두고두고 추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