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싱가포르 여행 중 센토사 섬에서의 시간은 '회복'이라는 의미로 남아 있습니다. 마리나 베이와 가든스 바이 더 베이 등 화려한 싱가포르의 도시 풍경과 상반된 여유로운 섬에서는 왠지 시간마저 조금 느리게 가는 기분이었거든요. 여행 전 친구가 '루지 한 번 타고 와'라고 추천했던 이 섬에서 저는 루지는 커녕 그 유명한 유니버셜 스튜디오 구경도, 해질녘 펼쳐지는 레이저 쇼도 보지 않았지만, 그저 빛나는 오후에 모래 사장을 걷고 가만히 앉아 해가 지길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 무척 행복했습니다. 긴 청바지를 입었던 것과 운동화를 벗어 맨발로 걷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 아쉬워요.
점심을 먹고 출발한 센토사 섬. 여덟 시쯤 해가 완전히 진 후 섬을 빠져나왔으니 대략 여섯 시간 정도 머물렀습니다. 섬에서 저는 별다른 것 없이 해변을 따라 걸었는데, 실로소와 팔라완이란 이름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 그 중 마지막으로 닿은 팔라완 해변은 유명한 휴양지인 실로소 해변과 상반된 한적한 풍경이 인상적이었어요. 여름 휴가철이지만 그리 붐비지 않는, 그래서 왠지 나만 아는 것 같아 뿌듯한 그런 해변 있잖아요. 팔라완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센토사 섬 서쪽으로 길게 뻗은 실로소 해변, 반면 팔라완 해변은 섬 중간쯤에 위치한 비교적 짧은 해변입니다. 동쪽으로는 산악 지형이 있거든요. 센토사 섬을 찾은 관광객들은 섬 내에서 운행되는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팔라완 해변은 섬 중앙에 있는 Beach Station에서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센토사 섬에 도착할 경우 멀라이언 상을 따라 내려온 뒤 실로소와 팔라완 해변으로 나뉘는 갈래길을 만나게 됩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실로소 해변을 찾습니다. 해수욕을 즐기기에 좋은 시설들과 카페, 레스토랑, 펍이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어 휴식을 즐기러 온 이들이 고민없이 머무르기 좋거든요. 반면 불과 삼사백 걸음 거리의 팔라완 해변은 강원도의 흔한 해변과 다름 없는 조촐한 시설에 눈에 띄는 식당도 많지 않습니다. 멋지게 비키니 수영복을 차려 입은 실로소 해변의 사람들과 달리 팔라완 해변에는 따로 수영복을 입지 않고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으로 서로 물을 튀며 노는 또래 친구들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띕니다. 저는 이 쪽이 더 정감 있어서 실로소보다 팔라완에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실로소는 연인의 해변, 팔라완은 가족의 해변 정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쉽겠죠? 그리고 팔라완에만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시아 대륙 최남단 전망대
The Southernmost point of continental Asia, 아시아 대륙의 최남단 지점이 싱가포르 센토사 섬의 팔라완 해변에 있습니다. 사실 이 전망대에 대한 정보는 해변에 도착한 후 스마트폰 앱을 무심히 넘겨보다 알게 됐는데요, 아직 대한민국 땅끝 마을도 가보지 못한 제게는 놀랍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아시아의 가장 남쪽에 있는 나라 싱가포르, 그 중에서도 가장 남쪽 지점입니다.
팔라완 해변 중간쯤 있는 흔들 다리를 건너면 아주 작은 섬처럼 꾸며진 아시아 대륙 최남단 전망대에 닿게 됩니다. 흔들 다리가 꽤 긴데, 폭이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 마주오는 사람이 있다면 로프에 바짝 붙어 양보를 해야하고, 사람 수가 많으면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흔들립니다. 아이들은 무척 좋아하더군요.
흔들 다리를 건너 닿게 되는 이 작은 공간이 바로 아시아 최남단 지점입니다. 2-30명이 한꺼번에 오르면 빈 자리가 없을 듯한 작은 공간에 전망대라면 으레 있다는 유료 망원경이 있습니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풍경은 바다뿐이고, 그나마 그리 멋지지 않은 배들만 가득 떠 있어 아시아 최남단의 낭만을 기대한다면 후회하겠지만, 그래도 기분만은 무척 특별합니다. 흔들 다리를 건너 전망대에 닿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습니다.
아시아 최남단의 전망을 더하는 목조 전망대에 오르면 팔라완 해변과 인도양의 풍경을 360도 뷰로 즐길 수 있습니다. 두 개의 전망대는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지어졌고, 나무 다리로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이 곳에서 내려다 보는 해변 풍경과 탁 트인 바다 전경이 정말 멋집니다.
저 흔들 다리는 건널 때는 곤욕스러웠는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푸른 물, 흰 백사장과 어울려 달력에서 본 듯한 장면을 연출하더군요. 전망대 위를 한 바퀴 돌며 감상하는 동안 좀전까지 뜨겁고 화창한 오후가 어느새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곧 비가 쏟아질 것처럼 잔뜩 찌푸린 것이 못내 야속했습니다. 조금 전처럼 화창했다면 정말 그림같은 풍경이었을텐데, 라고요.
하루를 식히는 싱가포르의 소나기
오후 내내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며 팔에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더니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이내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덥고 습한 싱가포르의 날씨, 아침부터 계속 머금은 수분을 한 번에 쏟아내는 듯한 세찬 비였어요. 덕분에 저와 이 전망대에 오른 십여 명의 여행자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아시아 최남단 전망대에 갇혀 두어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가 오는 방향을 피해 쪼르르 도망 다니는 모습이 재미있었어요.
싱가포르에 있는 동안 매일 비가 내렸습니다. 그것도 약속한 것처럼 늦은 오후에, 한두 시간씩, 아주 거세게 내렸습니다. 비는 그리 달갑지 않았지만, 내내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와 달리 아침부터 오후까지 화창하고 더운 싱가포르 날씨를 그대로 경험할 수 있어서, 그리고 더위에 지칠때쯤 시원하게 식혀줘서 좋았습니다. 비를 핑계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거든요.
팔라완 해변의 아시아 대륙 최남단 전망대에서 두어 시간 비를 피하는 동안, 저는 휴대폰을 꺼내 간단한 메모를 하며 짧은 여행을 정리했습니다. 그러다 지루해지면 젖은 나무 난간에 기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여기가 한국과는 일곱 시간 떨어진 싱가포르의 최남단 해변이라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여유로웠어요. 마리나 베이의 밤 못지 않게 기억에 남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내린 비가 그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덥고 화창한 오후가 이어졌습니다. 싱가포르의 날씨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아서 좋습니다. 전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는 듯한 다리를 건너 무사히 해변에 복귀한 뒤 어디론가 더 걸어볼까라는 계획을 덮고 센토사 섬의 노을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아시아 최남단 전망대의 여유가 하루를 바꿨습니다.
그리고 그 날, 그 여행의 마지막 밤에 저는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센토사 섬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너무 화려한 실로소 해변이었다면 이처럼 여유롭지 못했을 시간,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이만큼 기억에 남지 못했을 노을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센토사 섬의 화려함을 이야기하지만, 제게 이 섬은 팔라완의 여유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