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가을 사이, 메밀 ♡ 필 무렵
첫번째 책을 위한 원고가 이제 막 틀을 잡고 부끄럽지만 '탈고'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짧게나마 어디론가 떠날 기회가 생긴 것을 보니 그런대로 저는 운이 좋은 사람인가 봅니다. 날짜와 숫자는 가을이지만 공기와 햇살이 아직 여름을 잡아두고 있던 9월의 한가운데, 그리고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과 간절히 기다렸던 가을 사이에 한 눈 가득 펼쳐진 메밀꽃 풍경이 있었습니다. 메밀 하면 자연스레 함께 떠오르는 이름 '봉평' 풍경을 난생 처음 본다는 저를 그는 아침 일찍 서둘러 이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때는 이 고장의 가장 큰 축제라는 봉평 메밀 축제가 이제 막 끝났을 때입니다. 어제만 해도 이 꽃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서로의 행복을 빛내고 있었겠죠.
'메밀'이라는 이름 혹은 존재가 이토록 특별해진 것은 새하얀 꽃 가득한 가을무렵 메밀밭 풍경과 이효석의 단편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때문일 것입니다. 작지만 깨끗하고 순결한 느낌의 메밀꽃이 시선을 가득 메우는 풍경은 소설의 감성이 더해져 9월을 대표하는 축제가 되었죠. 효석문화제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봉평 메밀꽃 축제는 일년간 이 풍경을 그리워하던 이들과 소중한 사람과 함께 찾은 특별한 인연들이 모여 드는 축제입니다. 다른 꽃밭에서 느낄 수 없는 특별한 감성 때문에 아름답기보단 우아하다는 느낌이 더 잘 어울리는 장소, 분위기, 풍경이었습니다. 이효석 생가와 문학관을 중심으로 너른 메밀꽃밭이 행사장으로 사용되는데 이 곳이 아니더라도 이무렵 평창군 봉평면 곳곳은 흰색 메밀꽃으로 가득합니다. 드라이브를 하며 양쪽으로 펼쳐진 꽃밭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환하게 불을 밝혔을 축제 안내 표시, 메밀꽃밭에 들어가는 징검다리는 이 고장의 특별한 감성 때문에 마치 한걸음 걸을 때마다 소년이 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제게는 첫 메밀꽃 축제라 들어서는 기분이 남달랐어요.
그리고 돌계단을 몇 개 올라 축제장에 들어가사 기대만큼 눈을 가득 채운 하얀 메밀꽃밭 풍경이 펼져집니다. 사방에 보이는 능선과 등 뒤 시골 마을 풍경을 빼면 온통 흰 꽃뿐인 풍경이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 환상적입니다. 꽃밭 중간 중간에는 멋스러운 황색 오두막이 서 있어 운치를 더하고요. 지평선까지 쭉 뻗은 메밀꽃밭을 보는 것도 대단히 감동적입니다만 허리를 조금 숙이면 마치 하늘까지 모두 꽃이 핀 것처럼 눈 앞이 흰색과 녹색으로 가득 차는 것이 조금 더 특별한 감상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이 만든 날짜로 정한 축제는 끝이 났지만 그와 상관없이 메밀꽃은 여전히 새하얗게 빛나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녹색과 메밀꽃의 흰색이 만드는 조화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더군요. 해마다 이 먼 곳까지 사람들이 이 꽃을 보러 모이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 모여든 이들. 메밀꽃밭에서의 추억을 더 특별하게 남겨줄 거리의 화가들입니다. 이제 막 축제를 끝내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여유로운 풍경입니다. 손님은 없지만 화가들의 표정들은 한 없이 여유롭더군요. '그림 예쁘게 그려 드릴게요, 특별한 추억 만들어 가세요' 라는 그의 말이 호객이라기 보단 축제를 좀 더 즐겁게 만들어 주고 싶은 당부의 말로 들렸던 것은 제 착각이었을까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제 그림 하나를 남겼어도 좋았겠지만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던 것이 아쉽습니다.
축제 기간은 끝났지만 사람들의 감흥까지 모두 식기까지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메밀꽃밭 사이를 누비고 있었고 화가들 뿐 아니라 꽃밭을 배경으로 특별한 기념 사진을 남겨주는 축제의 사진가들도 손님들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 풍경 역시 눈밭같은 메밀꽃밭 사이에 있으니 그 자체로 여유로운 그림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축제가 조금 더 길어도 좋았을 텐데요.
메밀 꽃밭에 뛰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온 그와 말 없이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즐겼습니다. 저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메밀꽃 가득한 풍경을 카메라로, 스마트폰으로 찍었습니다. 넓은 풍경으로 담아 눈처럼 떨어진 작은 꽃의 설원을 담는 것도, 줌을 잔뜩 당겨 미처 보지 못했던 꽃 한 송이의 모습을 자세히 보는 것도 모두 재미가 있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메밀꽃 풍경 사이에서 저는 여름과 가을 사이의 따가운 햇살을 잠시 잊고 나무로 놓인 길을 한 블럭씩 꼭꼭 밟아가며 저만의 축제를 즐겼습니다. 코스모스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메밀꽃은 우아하고 순결한 느낌이 사랑스러운 꽃이었어요.
이 풍경 속에서 낮잠을 주무시는 아저씨도 한때는 저처럼 꽃밭에서 누군가를 떠올리고 괜히 신이 났던 소년이었을텐데 말예요.
메밀 축제에서 메밀 음식이 빠질 수 없습니다. 소설 제목을 딴 음식점을 찾은 그와 저는 메뉴판을 보지 않고도 같은 메뉴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뭔가 아쉬워서 둘러보다 메밀 전병을 하나 더 시켰죠. 먹을 수만 있다면 더 시키고픈 음식들이 많았을텐데 아쉽습니다.
메밀 막국수의 맛은 기대만큼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먹었던 것들보다 못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메밀꽃 사이라 이마저 '축제 음식이 다 그렇지 뭐'라며 웃게 되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때때로 몇몇 장면은 그것이 채 지나가기 전에 이미 추억이 되어 버리곤 합니다.
내년에도 그 후년에도, 앞으로 계속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이날의 메밀꽃 풍경을 그리워하게 되지 않을까요? 긴 긴 여름동안 가을을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듯이 말예요. 아마도 앞으로 매년 이 메밀꽃 가득한 봉평의 풍경이 이제 가을이 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될테니 다른 꽃축제 못지 않게 기다릴 소식 그리고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