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멘 한 그릇 먹으러 도쿄 외곽으로 가는 것. 어지간히 라멘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줄 서는 시간까지 합하면 밥 한 끼 먹는데 서너 시간을 써야 하거든요. 3박 4일 일정이라면 저도 포기했겠지만 이번엔 여유가 있어서 시도해 봤습니다. 미쉐린 빕구르망 리스트에 있는 도쿄 라멘집 리스트에서 이집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가게 이름입니다. There is ramen. 라멘이 있어요, 라는 의미일까요.

https://maps.app.goo.gl/S4uBHeecN9vYEHQJ8
There is Ramen · 3 Chome-10-16 Amanuma, Suginami City, Tokyo 167-0032 일본
★★★★☆ · 일본라면 전문식당
www.google.com
정말로 '여기 라멘 있어요!'라고 외쳐야 할 만큼 외딴 곳에 있습니다. 도쿄 스기나미 구의 좁은 골목길에 있고 제대로 된 간판도 없어서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방문하기 어려워요. 이런 곳에 미슐랭 라멘집이 있다니, 선정한 그들의 노력도 대단합니다. 아래는 미슐랭 가이드에서 가져온 이 집 소개입니다.

"국물은 말린 멸치의 풍미로 고기의 감칠맛을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독특하고 매혹적인 맛의 국물을 찾고 있다면 바로 이곳입니다. 차슈멘은 구운 돼지고기가 듬뿍 올려져 면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밥은 추가 메뉴로 주문할 수 있는데, 구운 돼지고기를 밥 위에 얹어 차슈동으로 만들어 먹어보세요. 정말 인상적이고 만족스러운 맛으로, 이곳에 라멘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증명해줍니다."
(출처 : https://guide.michelin.com/kr/en/tokyo-region/tokyo/restaurant/there-is-ramen)
https://guide.michelin.com/kr/en/tokyo-region/tokyo/restaurant/there-is-ramen
guide.michelin.com

수증기 자욱한 주방과 열 명도 채 못 앉는 바 좌석이 전부인 작은 식당입니다. 입구에 서서 기다릴 공간도 없어 보여요.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소니 라디오에서는 주인장이 즐겨 듣는 듯한 라디오 방송이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계기판으로 주파수가 표시되는 라디오 참 오랜만에 봅니다. 그 외에도 여기 저기 노포의 풍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본 식당들에서 기대하는 아날로그 무드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어요.


주문은 입구에 있는 티켓머신에서. 메뉴가 넷인데 차이는 토핑뿐이라 어렵지 않습니다. 토핑 없는 라멘이 980엔, 반숙 달걀을 올린 달걀 라멘이 1130엔, 돼지고기 차슈를 올린 차슈 라멘이 1380엔, 완탕 라멘이 1260엔입니다. 차슈 라멘과 완탕 라멘에 150엔을 추가하면 달걀을 추가할 수 있고요. 1530엔이면 딱 이동네 표준 가격 정도로 보입니다. 유명 라멘집 기준으로요.

가장 인기 있다는 차슈 라멘을 주문했습니다. 당연히 반숙달걀을 추가했고요. 이집 라멘의 특징은 멸치 육수를 베이스로 했다는 것입니다. 미리 알고 봐서 그런지 멸치국수 국물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차슈 라멘답게 차슈가 보통 라멘집의 토핑 이상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과장 조금 보태 면보다 고기가 더 많아요. 거기에 멘마, 김, 파 그리고 작은 어묵 하나가 올라가 있습니다. 구성도 담음새도 무뚝뚝한 것이 이집 분위기에 잘 어울려요.

하나에 150엔인 맛달걀. 맛달걀만 올린 라멘을 따로 메뉴로 뺄 정도라 기대했는데 예상 정도의 맛이었습니다. 노른자의 부드러움, 전체적인 간이 정석에 가까운. 뭐, 이 정도만 해줘도 좋죠.

메인인 라멘. 차슈부터 이야기하면 우리나라에서 먹는 수육과 흡사합니다. 제가 방문한 일본 라멘의 차슈 중 상당 수가 삶은 고기의 겉면을 토치로 그을려서 불향과 겉바속촉 식감을 내세웠는데 이집 차슈는 기교 없이 푹 삶았어요. 두께도 적당히 두껍게 썰어서 왠지 김치에 싸 먹거나 마늘, 쌈장 올려서 먹고 싶더군요. 일본 라멘보다는 한국, 중국 면요리에 더 어울릴 법한 고기였습니다.

이집 라멘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물. 멸치를 오랜 시간 끓여 우려낸 육수를 사용합니다. 간은 간장으로 맞췄고요. 그동안 해산물 육수를 사용한 라멘들은 여럿 먹어 봤지만 멸치 육수 베이스의 라멘은 처음이었어요. 식당에 진동하는 멸치 육수 냄새를 맡으며 라멘과 잘 어울릴까 고개가 갸우뚱했지만 먹어 보니 이집만의 방식으로 잘 풀어냈습니다. 라멘의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넓군요.
다만 멸치 국수를 먹듯 다가가면 당황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먹는 멸치 국수의 국물보다 3-5배는 농도가 진하거든요. 우리는 깔끔하고 담백하게 멸치 육수를 즐기지만 이집은 마치 돈코츠 라멘의 국물을 뽑듯이 멸치의 맛과 향을 아주 진하게 즐깁니다. 한 입 마시면 끝맛이 텁텁해 질 정도로요. 특히나 이날이 문제였는지 멸치 내장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았을 때 나는 쓴맛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국물은 별로 마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민감한 차이인데 이들은 이것마저 멸치 육수의 매력이라고 느끼는지.

면은 평범한 중면. 멸치 육수를 쓴 것 외에는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면과 달걀, 고명인 차슈까지. 오죽했으면 정말로 미슐랭 가이드 선정된 집이 맞는지 다시 찾아봤겠어요. 밤 열한시에 먹어도 부담 없는 깔끔한 멸치국수 맛을 좋아하는 제 입맞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도쿄 라멘 투어에 대한 회의감까지 생겼어요. 이렇게 라멘만 먹는 게 맞나, 하고요. 그래서 이날 이후로는 버거와 프렌치 토스트, 초밥 등 제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선택의 폭을 넓혔습니다.
일본 라멘이 발달하면서 메뉴가 세분화되고 즐기는 사람들의 취향들 역시 뚜렷해지는 것 같아요. 찾아보니 이집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게는 도쿄 라멘들 중 가장 아쉬운 한 그릇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