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너무도 당연히 누리는 것들이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의 화상 대화, 스마트폰 화면 속 지도가 알려주는 길찾기, 따로 저장 공간을 가지고 다닐 필요 없는 클라우드 컴퓨팅 등. 제가 어렸을때까지만 해도 상상만 하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면 어찌 될까 걱정이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고 막막하죠.
제가 사진을 좋아해서인지 카메라의 변화 역시 예전과 비교하면 대단합니다.
제가 처음 구매한 디지털 카메라가 약 200만 화소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수천만 화소가 기본이 됐고 저장 공간도 MB 단위에서 GB 단위가 됐죠. 하지만 무엇보다 큰 변화는 그보다 앞서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미지의 저장 및 표현 방식이 바뀐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큰 차이점이 발생합니다.
디지털 카메라 - 디스플레이 = ?
필름 사진과 디지털 사진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를 꼽는다면 인화 과정 없이 촬영한 이미지를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대부분 카메라에 있는 화면을 통해 이뤄지고요. 촬영 직후 방금 촬영한 이미지가 자동으로 화면에 표현되고, 원할 땐 언제든 지난 사진들을 넘겨볼 수 있습니다. 이는 디지털 이미지 그리고 디지털 카메라의 본질과도 같았습니다.
반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 과정을 제거할 생각을 실행에 옮긴 브랜드가 있습니다. 촬영한 이미지를 즉시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핵심 기능이 결여된 제품을 출시하는 자신감이 놀랍습니다. 현재도 전체 매출에서 필름 카메라의 비중이 상당한 수익 구조와 주 고객층에 대한 분석 때문일까요. 물론 앱이나 전자식 뷰파인더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지만 기존 디지털 카메라에 비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굳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여전히 의문인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꽤 만족하면서요.
그 출발점은 이 발칙한 발상에 대한 흥미였고 다음으로 그들과 대화를 해 보고 싶은 욕심이었습니다.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이 카메라가 어떤 경험과 결과물로 이어지는지 말이죠.
라이카 M10-D
이 카메라를 사용한 지는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습니다. 틈 날 때마다 챙겨나가 사진을 찍으며 장단점과 매력, 속에 담긴 철학을 제 나름의 언어로 풀이해보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불편함을 빠짐 없이 겪고 있고,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도 건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만족. 아마 아직까지는 불편함을 감수할 만 한 거겠죠.
이따금씩 손가락이 허전합니다. 굳이 이러면서까지 이 카메라를 써야 하나 싶은 생각도 종종 합니다.
아마도 역사상 가장 특이한 디지털 카메라, 라이카 M10-D의 소개와 첫인상은 지난 포스팅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덜어 낸 만큼 채워지는 것
아직까지는 새로운 것을 즐기는 제 모습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카메라를 만지작거는 동안 이 답답한 카메라 때문에 생길 해프닝이 기대됐거든요.
M10-D와 함께 첫 여행을 떠나면서, 이 카메라만의 결핍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규칙을 정했어요.
이미지 리뷰 포기를 단념하고
숙소에서 촬영 데이터를 백업하지 않기로.
모든 건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뒤의 일로 미뤘습니다.
대신 배터리와 메모리카드를 넉넉하게 준비했어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여유입니다. 찍은 사진을 그때마다 확인하는 습관이 사라지니 자연스레 여행지의 풍경에 그만큼의 시간과 관심을 더 들일 수 있었습니다. 여행의 가장 큰 부분이 사진 촬영인 저는 저도 모르는 새 많은 시간을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데 보내고 있더라고요. 잠깐씩이지만 그 시간들이 모이니 제법 길었습니다.
물론 당장은 답답하고 불편합니다. 촬영 후 습관처럼 엄지 손가락을 카메라 뒷면, 재생 버튼이 있을만한 곳에 가져다 댈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당연히 그 결핍에 곧 익숙해지고, 화면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바다와 꽃을 바라보는 데 보냈습니다.
거짓말을 보태 하루를 좀 더 길게 쓰고 여행을 한층 진하게 즐겼다고 할까요. 기대했던대로.
물론 이런 변화를 위해서는 굳이 화면을 없앨 필요가 없죠. 화면을 보는 습관을 바꾸던지 아예 커버로 덮어버리면 간단합니다.
꼭 필요할 땐 화면을 볼 수 있는 이 방식이 사실 뭘로 보나 낫지만, 사람 맘이 욕심이 또 생각처럼 되지 않잖아요.
그러니 이런 제품을 찾는 저같은 사용자가 있지 않을까요?
숙소에 돌아오면 씻는 것보다 먼저 그 날 촬영한 이미지들을 노트북으로 확인하고 백업하는 습관도 바꿔봤습니다.
카메라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다음날까지 열어보지 않는 것으로.
자연스레 저녁 시간이 길어졌어요. 저녁 식사를 직접 해 먹거나 숙소 근처를 산책하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잠자리에 좀 더 일찍 든 날도 있었어요.
하루, 이틀은 궁금함과 조바심에 시달렸지만 적응하니 이쪽이 여러모로 좋습니다.
여행의 피로를 풀기에도, 낯선 도시에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기에도.
이번 M10-D 동반 여행에서 가장 많이 절약한 것은 카페에서의 시간. 중간 중간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아픈 다리를 쉬거나 숨을 돌릴 때 카메라 속 이미지들을 확인하는 데 보내는 시간이 없어지니 오후가 훨씬 길어진 기분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카페 분위기를 즐기고 다음 목적지를 계획하는 데 또는 대화하는 시간으로 썼어요. 그래도 남으면 카메라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M10-D를 통해 덜어낸 것은 습관, 얻은 것은 여유입니다.
당장은 답답해도 이 여유에 빨리 익숙해지고 싶은 것을 보면 이 변화를 저는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것 같아요.
미리, 몰래 엿보는 즐거움
찍은 사진을 볼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Wi-Fi 무선 통신을 통해 스마트폰/태블릿과 연결하면 이미지를 확인하고 전송할 수도 있습니다. 라이브 뷰 촬영도 가능하고요. 이전 세대의 화면 없는 카메라 M-D가 도무지 이미지 확인 방법이 없었던 것과 달리 숨통이 좀 트인 셈입니다. 카페에서 한 번 사용해 보았는데, 인화 전의 사진을 미리 엿보는 것 같은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묘한 재미가 있었습니다.
아래는 M10-D의 Wi-Fi 무선 통신과 LEICA FOTOS 앱의 설정 및 지원 기능을 정리한 포스팅입니다.
무선 통신 기능은 아직 이 카메라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제 조급함을 달래는 작은 숨구멍같은 존재입니다.
이미지 리뷰뿐 아니라 촬영 화면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라이브 뷰 촬영도 이 FOTOS 앱을 통해 무선으로 이뤄지거든요.
물론 앞으로는 이마저도 이용하지 않는 것이 목표입니다만.
다행인 건지 그간 사용했던 타사 카메라보다 무선 연결의 속도가 형편 없이 느려서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컨셉을 위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닐테고, 관련 기술력의 부족인 걸까요.
그런데도 마음 한 켠에선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어느새 길들여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장 공간에 대한 욕심
M10-D를 사용하며 새롭게 생긴 것이 있다면 저장 공간에 대한 욕심입니다.
그간은 64GB의 메모리 카드를 사용하며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거든요. 중간 중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미지는 삭제할 수 있었고, 매일 숙소에서 노트북이나 외장 저장 장치에 데이터를 백업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카메라는 이미지를 확인/삭제하는 기능이 없으니 보다 큰 저장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여행을 앞두고 256GB의 SD 카드와 여분의 SD 카드를 보관하는 케이스를 구매했습니다.
닷새 간 촬영한 데이터가 총 50GB 정도니 사실 기존 64GB 카드로도 괜찮았겠지만 백업 없이 오랜 기간 여행할 수 있다는 안도감만으로도 좋은 지출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필름 카메라 사용자가 긴 여행을 앞두고 필름을 넉넉하게 챙긴 것 같은 마음의 안정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들
반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첫 번째가 배터리. 카메라에서 배터리를 가장 많이 소모하는 장치 중 하나인 화면이 사라졌으니 기존 M10 시리즈보다 배터리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체감되는 차이는 미미했습니다. 일반 M10 카메라를 사용할 때와 같이 배터리 하나만으로는 하루 촬영이 어려웠어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M10 시리즈의 배터리 소모에서 화면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거나, 제 생각보다 제가 카메라 화면을 많이 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장 불편한 것은 라이브뷰 촬영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촬영은 뷰파인더만으로도 어려움이 없었지만, ND 필터나 CPL필터를 사용할 때 촬영 화면을 볼 수 없는 점이 무척 답답했어요. 가뜩이나 RF 카메라의 뷰파인더는 SLR 카메라의 그것과 달리 필터 적용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요. 곧 '이 카메라는 이런 것들은 포기해야 하는구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이 카메라를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가 '결핍' 그리고 '포기'같은 것들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편함이 전환점으로
쓰다 보니 장황한 문장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이 카메라를 변호하는 것만 같습니다만, 제게 이 카메라는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화면의 존재를 제거함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불편함들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결핍을 곱씹다보면 그것이 사진을 즐기는 데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니까. 프레임을 보고 셔터를 눌러 순간을 기록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으니.
과거를 돌아보는 것을 미루니 현재를 즐기는 데 열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사진을 찍는 데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괴상한 디지털 카메라 M10-D와 첫 여행을 함께 하며 느낀 장점입니다.
사실 처음에 기대했던 '마치 필름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같은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이 카메라는 어디까지나 독특한 디지털 카메라이고, 손끝에서 생각으로 이어지는 변화들은 디지털 사진의 또 다른 영역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에게 추천은 못 할 것 같아요.
어느 여행 못지 않게 즐겁게 찍어 온 지난 부산 여행의 기록들을 덧붙이며 설익은 후기를 마무리합니다.
앞으로 길게 함께하길 기대하는 맘으로 종종 이렇게 사진과 소감들을 포스팅하겠습니다.
[ 라이카 M10-D로 촬영한 이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