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잠시나마 저 그리고 제 일상과 떨어져있고 싶어 떠났던 날에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고, 어느새 계절마다 만나는 사이가 됐습니다. 늘 계획없이 갑작스레 만나는 것도 변함이 없네요. 가장 최근엔 라디오 사연을 듣다 마음이 움직여 주말 밤샘 기차표를 예매했거든요. 정동진까지 밤새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는 탁하고 지저분했지만 또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우리 나라에서 해 뜨는 것을 봤거든요.
카메라 하나 들고 다녀온 당일치기 여행. 저는 강릉과 늘 이렇게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강릉의 장소, 그리고 문득 떠나고 싶을 때 다녀올 수 있는 하루짜리 여행 코스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조금만 부지런 떨어 밤기차를 타면 하루를 거의 온전히 쓸 수 있고 낮과 밤, 바다와 숲 모두 즐길 수 있어 제가 늘 밟고 오는 길입니다.
청량리 - 정동진 밤기차
밤 열한 시 이십 분, 청량리역을 출발해 강릉까지 달리는 밤기차가 있습니다. 시설이 좋지 않은 무궁화호에 다섯 시간이 넘는 여정도 지루하지만 해 뜨기 전 정동진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주말에는 모든 표가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기차에서 시간을 보내니 다녀온 후 이삼 일 피로에 시달렸지만 한 번쯤 해볼만한 낭만이 있었어요.
정동진 역은 바다와 가깝기로 유명하죠. 기차가 도착한 것이 다섯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는데, 조금만 걸으면 바로 해변에 닿습니다. 저는 이십 년만에 오는 곳이라 어디서 일출을 봐야할지 찾느라 일출까지 남은 두어 시간을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새벽 공기가 차갑고 파도 소리가 날카로워 피로도 금새 잊고요.
이 날 일출은 여섯 시 반이었고 얼추 한 시간 동안 푸른색에서 주황색, 그리고 다시 푸른 빛으로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함께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 대부분이 썬크루즈와 배 모양 구조물이 보이는 이쯤에서 일출을 감상했습니다. 저처럼 사진으로 담으려 온 사진가들도 많았고요.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발길을 돌리며 시계를 보니 아직 여덟 시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여행이 시작된 것처럼 설렜습니다.
일출 사진을 담기에 정동진은 무척 좋은 곳입니다. 배 모양의 구조물이 좋은 피사체가 되어 주기도 하고, 접근성 역시 좋거든요. 해가 뜨기 전 깊은 어둠이 깔렸을 때는 장노출 촬영으로 바다를 담아보고, 해가 떠오르는 동안엔 강렬한 컬러와 실루엣으로 프레임을 구성하면 좋습니다. 시간 여유가 된다면 해가 떠오르는 순간을 타임랩스 영상으로 담아도 좋겠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2cLZ9I9X208&feature=emb_title
이렇게 밤기차를 타고 태양보다 먼저 하루를 맞는 여행도 썩 괜찮겠죠? 1박 2일 일정을 잡지 않아도 하루동안 해돋이와 아침, 오후, 저녁까지 하루를 오롯이 쓸 수 있으니 가볍게 떠나고 싶을 때 추천할 수 있는 기차, 장소입니다.
허난설헌 생가 터
정동진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편하게 강릉 시내로 올 수 있습니다. 해돋이 외에는 특별히 볼 곳이 없는 곳이라 강릉으로 바로 오시는 게 좋겠어요. 다음으로 가볼만한 곳은 허균/난설헌 기념관 곁에 있는 작은 숲 그리고 그 사이로 난 짧은 산책로입니다. 제가 강릉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에요. 정동진역에서 바로 가는 버스는 없지만 시내쯤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면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습니다.
기념관과 허난설헌 생가 터도 둘러보기 좋지만 그보다 저는 키 큰 소나무 서 있는 길이 좋아서 이제는 이곳만 둘러보고 떠나곤 합니다. 바다보다 먼저 이곳을 찾은 것은 이른 아침엔 아침 산책을 나온 시민 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숲의 고요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포호와도 이어져 있어 순서대로 다른 곳을 찾아가기도 좋고, 초당 마을과도 가까워 아침 식사를 하기에도 좋습니다.
까마득히 높은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으면 바람과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소리밖에 들리지 않고, 그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덕분에 생각과 마음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이 감동을 효과적으로 담으려면 광활한 초광각 렌즈로 머리 위 풍경을 담거나, 어안 렌즈로 독특한 프레임을 구성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환한 아침의 빛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 것도 좋겠고요
처음 이 솔숲에 오던 날이 아마도 한창 답답하던 때였는지, 여기서 크게 소리를 지르진 못해도 긴 한 숨이나마 뱉고 나면 마음이 한결 후련해집니다. 계절마다 강릉을 찾는 이유에 이 작은 숲을 빼놓을 수 없어요.
경포호
넓은 호수 주변을 두르는 산책길은 심심치 않게 있지만, 경포호만이 주는 고즈넉함이 있습니다. 특히 봄이 되면 꽃망울을 터뜨린 벚나무가 호수를 빙 두르고 있는 풍경이 장관이죠. 이날은 시간이 많지 않아 빠르게 걸어 나왔지만 허난설헌 생가 터, 경포 해변과 초당 마을까지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잠시라도 들러볼만한 곳이에요.
경포호
경포보다 소박한 해변이 언제고 언제까지고 머물기 좋아서 늘 여기 머물다 갑니다. 북쪽으로 경포, 남쪽으로 안목이 있지만 여기만큼 설레진 않습니다. 유독 함께 온 청춘들이 많은 해변이라 저도 괜히 가슴이 뛰는지도 모르겠어요. 모래사장 입구에는 사진 찍기 좋은 액자형 구조물이 띄엄띄엄 서 있어서 동해 여행 인증샷 찍기에도 좋습니다. 저녁에는 솟대 다리가 조명으로 물드니 만약 숙소를 이 주변으로 결정하셨다면 밤바다 산책을 다니시는 것도 좋고요.
허난설헌 생가 터
아쉽게도 이 날은 업무 때문에 이른 오후에 돌아와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들린 곳이 안목 해변입니다. 특별한 장소에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찾은 것이 인연이 되어 종종 그리운 곳이 됐죠. 그때보다 사람도 많고 깨끗한 새 카페들도 늘어선 모습이 어딘가 낯설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매력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밤을 새고 다닌 피로가 이때 몰려와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안목 해변의 매력이죠. 이 한 잔의 여유만으로도 충분히 찾아올 가치가 있습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창 밖에 펼쳐진 해안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죠. 이날은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놓고 디오라마 아트 필터 영상을 촬영했습니다. 분주하지만 여유로운 모습들이 잘 담겨 있죠.
돌아가기 전 잠시 모래 사장에 앉아있는다는 게 파도와 햇살에 취해서 두어 시간을 보냈습니다. 돌아가는 버스를 몇 번이나 취소하고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강문 해변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하루 더 여유있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언젠간 느긋하게 함께할 날이 있겠죠.
밤기차를 탄 시간부터 오후까지 짧은 시간동안 해돋이를 보고, 솔숲을 산책하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모래사장에 주저 앉아 가을 햇살을 맞았습니다. 정동진에서 강릉은 버스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고, 허난설헌 생가터부터 경포호-초당마을-강문-안목으로 이어지는 길 역시 이동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으니 당일치기 여행을 꿈꾸는 분들께 추천해 봅니다. 저처럼 여행 겸 출사로 다녀와도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