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먼 돈이 생겼습니다. 이유 없이 무기력한 요즘 보기 드문 행운입니다.
길에서 주운 것은 아니고, 원고 담당자의 착오로 진행된 수정 작업에 기대하지 않았던 추가금액이 책정됐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 5만원을 꼭 오늘 다 쓰고 싶었습니다. 그것도 알차게, 게다가 기억에도 남게. 사실 두어달 동안 마음이 붕 뜬 채 슬럼프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라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공원이나 산보다는 바다가 좋겠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단 커피라도 한 잔 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이어지더군요.
바다, 커피 그리고 추억.
거기에 꼭 맞는 곳이 생각났습니다. 사,오년 쯤 전에 다녀왔던 것 같습니다. 대강 예산을 떠올려보니 5만원에 어찌어찌 가능하겠더군요. 곧장 가방을 챙겨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마침 가방에 PEN-F, 카메라가 있었던 것이 무척 기뻤습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강릉행 버스를 탔습니다. 11시 10분 버스, 가격은 13700원. 중간중간 들러 가느라 두 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해변까지의 시간을 생각해보니 세 시 전에는 모래를 밟을 수 있겠더군요. 바다와 커피 외에는 다른 계획도 필요 없는 짧은 시간, 그래서 버스에서 좋아하는 노래나 흥얼거리며 짧은 나들이의 설렘을 즐겼습니다.
이제 남은 돈은 36300원입니다.
강릉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한 시 오십 분. 곧장 시내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 요금은 1170원입니다. 낡은 녹색 버스 앞자리에 앉아 버스가 종점인 안목 해변에 도착할 때까지 경치를 감상했습니다. 얇은 옷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햇살이 따끔거리더군요. 강원도는 서울보다 봄이 빨리 왔나 봅니다. 예보를 보니 내일 오후 최고 기온은 27도까지 올라간다네요.
이제 잔액은 35130원.
두 시 삼십 분, 버스가 차고지에 도착했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에 표시된 지도를 따라 해변, 그리고 카페거리 쪽으로 걷는데 벽화가 그려진 좁은 골목을 보니 어렴풋이 그 때 기억이 납니다. 역시 그 때 왔던 것이 맞았습니다. 좁은 골목이 끝나는 길엔 4,5층 짜리 건물 두 개 사이로 푸른 빛이 선명합니다.
- 서울을 떠난 지 세 시간 반 만에 안목 해변에 도착했습니다. -
친구, 연인 단위의 여행객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래도 안목 해변은 여전히 한적한 느낌입니다. 동해바다 특유의 깊고 진한 푸른 빛의 바닷물도 여전합니다. 마침 요며칠 미세먼지 없이 화창한 날씨가 계속돼 그야말로 선명하고 깨끗한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급히 오느라 여분의 양말이나 수건이 없으니 바닷물에 발 담그는 건 포기하고 눈과 귀, 가슴에 담아가기로 합니다.
사진첩을 뒤져 보니 5년 전 여름 휴가로 강릉에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땐 이곳이 카페 거리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도 모르고 물이 맑고 해변이 한적해서 차를 세웠었는데, 이제는 강릉을 찾는 많은 분들이 거쳐가는 곳이 됐습니다. 해변에 늘어선 카페거리를 보니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이 많은 카페들 중 스타벅스에 갔었던 것이.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닿을 듯 마주보고 있는 부두길을 걷는 것도 즐겁습니다. 이 길 때문에 제가 5년이 지난 지금도 이 곳을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곳은 해변보다 사람이 더 없어서 연인과 한적하게 이야기를 하며 걷거나, 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좋습니다..만, 다른 곳보다 바닷바람이 유독 강해서 머리칼이고 표정이고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두 아래 낚시하는 풍경을 보니 물이 정말 맑습니다.
푸른 빛으로 눈을, 파도 소리에 귀를 위로하고 난 후에는 모래 사장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습니다. 낡은 가죽 가방은 나중에 모래를 털어내면 그만이니 내용물을 빼서 바닥에 깔고 파도가 덮치지 않을만큼만 가까이 가서 여유를 만끽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사진도 여러 장 찍어 봅니다. 매번 말하는 것이지만 여행용 카메라는 가벼울 수록 좋습니다.
다섯 시가 다 돼서야 바다 이외의 목적이 떠올랐습니다. 적당한 카페를 찾는데, 커피 맛보다는 바다가 보이는 뷰를 중점으로 하다 보니 해변에 맞닿은 엘빈(L.Bean)이 적당해 보이더군요. 사실 요즘 트렌드에 맞춰 옥상을 멋지게 꾸민 카페들도 있었지만, 그런 곳들은 죄다 연인들로 가득해서요. -커플 망해라-
엘빈 카페에서 하우스 블렌드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그제서야 아침에 바나나 한 개 외에는 먹은 것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고, 케이크들을 보다가 치즈 수플레 케이크를 하나 시켰습니다. 하우스 블렌드 커피의 가격은 3600원, 치즈 수플레는 5500원입니다. 사실 딸기 생크림 케이크가 더 먹고 싶었습니다만 가격이 6000원이었습니다.
벌써 잔액은 26030원, 절반을 썼습니다.
4층 옥상에서 홀로 커피와 케이크의 여유를 즐기려고 했습니다만, 기대와 달리 옥상은 의자 없이 마룻바닥으로 되어 있더군요. 커피를 마시기보단 잠시 경치를 보고 오는 곳 정도인 것 같습니다. 뭐, 그래도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해변 풍경은 꽤 근사했습니다. 다시 케이크를 들고 내려오니 3층 창가에 한 자리가 있더군요. 기분 좋게 4인 좌석을 혼자 차지하고 앉아 허기를 채우고 갈증을 달랬습니다. 최대한 편하게 앉아 지인들에게 바다 사진을 보내며 자랑을 하고요. 시간을 보니 다섯 시 반. 도착한 지 세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많은 일들이, 감정들이 있었습니다.
여섯 시쯤 카페에 나와서 다시 해변을 보니 그새 좀 질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몰은 경포호에서 보기로 하고 거리를 계산했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 쯤 걸린다기에 그러기로 했습니다. 또 언제 이렇게 한가하게 해안가를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한동안 파도 소리 그립지 않게 실컷 보려고요.
하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사장을 한 시간동안 걷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송정 해변을 지나자 군부대 소초가 있어서 더 이상 걷는 것도 불가능했고요. 그렇게 해안선에서 나와 차도로, 인도와 밭길 사이를 걸었습니다. 다행히 인적 드문 시골 동네는 풍경 하나하나가 바다 못지 않게 아름다워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경포호에 도착하기 전에 해가 다 떨어지면 어쩌나, 싶은 고민만 있었죠.
- 경포 호에 비친 노을 -
일곱 시가 조금 넘어, 붉고 동그란 해는 사라졌지만 다행히 노을빛이 완전히 가시기 전에 경포호에 도착했습니다. 십 년 전쯤 온 경포호는 호수 둘레로 벚나무가 가득한 낭만적인 곳이었는데, 이제 꽤 세련된 근린 공원이 됐더라고요. 일산 호수공원이나 후쿠오카 오호리 공원이 떠올랐습니다. 목표가 강물에 비친 노을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공원 초입까지만 걸어 들어가 잠시 앉아 있다 왔습니다. 경포대 밤바다도 봐야 했거든요.
- 경포대 밤바다 -
근사한 호수와 멋진 해변이 맞닿아 있다시피 한 경포는 정말 멋진 동네입니다. 새로 지어진 멋진 호텔 때문에 일전의 호젓한 느낌은 더 이상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넓고 깨끗한 해변과 바다에서 해가 완전히 지고 파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남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이 깊어져 돌아가야 할 시간을 재야하는 제 사정과 달리 해변에는 꼭 안은 연인들과 삼삼오오 즐기는 친구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버스 시간표를 보니 서울로 가는 버스는 이제 두 대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밤바다에서 기념 사진 한 장 -
곧장 터미널로 가려니 무언가 허전하다 싶더니 허기가 몰려옵니다. 종일 먹은 것이라곤 바나나 한 개와 케이크 한 조각. 그래도 명색이 당일치기 여행인데 배 곯고 돌아갈 수는 없어서 식당을 찾아보기로 합니다. 중앙시장의 이름을 미리 들어 놓았고, 검색 결과 대부분은 이미 문을 닫았지만 아홉 시까지 영업하는 식당이 남아 있습니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습니다. 계산해 보니 간신히 저녁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버스 요금은 아까와 같이 1170원. 아이고 이제 24860원 남았습니다.
중앙시장 정류장에 내려 빠른 걸음으로 안쪽 골목에 있는 ‘감자바우’라는 식당을 찾아갑니다. 감자 옹심이가 맛있다는 식당인데, 8시 30분에 도착한 저를 보고 주인 아저씨가 잠시 고민하시더니 식사를 허락하셨습니다. 옹심이 한그릇은 빨리 된다는 말에 안도를 하며 감자전 주문을 슬쩍 같이 밀어 넣었습니다.
5분 후에 나온 옹심이 한그릇과 감자전. 갓 나온 옹심이는 생각보다 더 뜨거워서 후후 불어가며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영업 시간도 영업 시간이지만 서울 가는 버스를 타려면 저도 아홉시 전에 나가야 했거든요. 급하게 먹었지만 감자 옹심이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담백한 강원도의 맛이었습니다. 종일 굶었으니 뭐가 맛있지 않았겠냐만은. 아홉 시를 몇 분 앞두고 계산대에 선 제게 주인 아저씨는 놀라시며 ‘천천히 먹지- 괜찮은데.’라며 미안해 하셨습니다. ‘원래 빨리 먹어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기억에 남을 식사였습니다. 가격은 11000원. 얼마나 급하게 먹었는지 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니 ‘환승’이랍니다.
짧은 여행은 끝나가고 잔액은 13860원이 남았군요.
아홉 시 십 분에 강릉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배차를 보니 아홉 시 삼십 분에 동서울로 가는 버스가 있습니다.
티켓을 사고 승차홈에 앉아 수첩 속 간이 가계부를 보니 잔액이 160원입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정말 5만원으로 알차게 하루 놀았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손에 익은 카메라와 마음에 쏙 드는 단렌즈는 장비 고민 없이 여행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매력입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제가 강릉 해변에 앉아 신발 속 모래를 털며 오후를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그간 갈 곳 없이 헤매던 마음도 이제 좀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니 가끔 이렇게 이런저런 핑계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단순히 다녀오는 것만으로 뭐가 달라지겠냐 싶었는데, 역시 일단 떠나면 뭐든 생기는 것이 여행인가 봅니다. 커피 마시러 강릉에 가는 사치, 아마 두고두고 이 날의 짧은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팟타이 먹으러 태국에 다녀올 때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