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여행,
하나의 눈.
오랫동안 질리지 않는 취미로, 그리고 요즘은 종종 일로 사진을 찍으며 늘 머리와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는 바람은 가장 중요한 순간을 담아줄 신뢰할 수 있는 카메라와 렌즈를 찾는 것입니다. 십 년 넘게 수많은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오랫동안 여행을 앞두고는 별 고민 없이 가진 것 중 가장 비싸고 좋은 카메라 그리고 프레임 조절이 가능한 초광각 줌렌즈를 챙겼습니다만, 언제부턴가 단렌즈를 주력으로 사용하면서 여행도 하나의 단렌즈로 모두 기록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반쪽짜리지만 짧고 긴 여행마다 꾸준히 시험하고 있고요.
스튜디오 촬영에서도 조명을 오직 하나만 사용하는 어떤 사진가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태양이 하나뿐이지 않느냐’라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렌즈에 대한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사람의 눈은 한 쌍이니 내 시선을 가장 잘 표현하는 하나의 렌즈만 있다면 충분하다고요. 그래서 아직까지는 지치지 않고 제게 꼭 맞는 렌즈를 찾고 있습니다.
올림푸스 카메라를 벌써 삼 년 가까이, 여러대 사용하고 있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카메라는 PEN-F 입니다. 그리고 그 단짝인 17mm F1.8 렌즈와의 조합을 좋아합니다. 얼마 전 짧게 여수를 여행할 때도 이 조합으로 여러 장면들을 담았습니다. 어딘가에 저와 같은 믿음을 갖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하나의 단렌즈로 담은 여행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줌렌즈가 단렌즈보다 다양하긴 해도 반드시 낫지는 않다는 것을.
단 하나의 시선, 17mm 프레임
이틀간의 여수 여행 중 첫째 날은 9-18mm F4-5.6 줌렌즈를, 둘째 날은 17mm F1.8 렌즈를 사용했습니다. 덕분에 두 렌즈의 장단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9-18mm F4-5.6 렌즈는 단렌즈에 준하는 휴대성으로 광활한 9mm 초광각 촬영이 가능하다는 점이 여행용 렌즈로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반면에 이미지 품질과 야경 표현 등은 다소 아쉬웠습니다.
17mm F1.8렌즈는 9-18mm 렌즈에 비해 화각이 눈에 띄게 좁아 풍경 촬영 빈도가 높은 여행에선 프레임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무척 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시원시원한 광각 이미지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이 렌즈를 여행용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요. 하지만 여행 사진의 본질을 ‘내가 보고 느끼는 것을 담는 행위’로 정의한다면 시선과 가까운 17mm 렌즈의 프레임은 무척 편안하고 정직한 인상을 줍니다. 눈보다 넓은 광각 렌즈의 프레임과 망원 렌즈 특유의 배경 흐림/압축 등 다분히 사진적인 연출이 없어 극적인 느낌은 덜할지 몰라도 잘만 다루면 장면 자체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여행 둘째날 일출 장면 앞에서 렌즈를 9-18mm F4-5.6에서 17mm F1.8로 교체한 직후에는 눈에 띄게 좁아진 프레임이 답답했지만 곧 내가 보는 것 그대로를 담을 수 있는 매력에 적응해서 오히려 전날보다 더 즐겁게 여행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여러 장을 찍어도 비슷비슷한 초광각 렌즈의 사진과 달리 17mm 렌즈는 시선 그리고 카메라를 향하는 방향마다 다른 장면과 연출이 가능해서 즐거웠습니다.
- 음식 사진을 찍기에도 좋습니다 -
F1.8 렌즈의 심도 표현
F1.8의 밝은 조리개 값은 줌렌즈를 사용할 때 누릴 수 없는 단렌즈만의 매력입니다. 사실 줌렌즈의 편의성을 포기하고 단렌즈를 고집하는 이유 중 밝은 조리개 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휴대성과 화질 못지 않습니다. 광활한 전경을 담는 광각 렌즈와 다른 17mm 렌즈의 촬영은 주 피사체를 부각시키는 연출이 주가 되기 마련인데, 이 때 F1.8 개방 촬영의 얕은 심도로 주제를 부각시킬 수 있습니다.
빛이 부족한 실내/야간 환경에서도 보다 빠른 셔터 속도, 낮은 ISO 감도를 확보할 수 있어 선명하고 깨끗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위 이미지들은 17mm F1.8 렌즈의 F1.8 최대 개방 조리개 값으로 촬영한 것으로 심도 표현의 장점이 잘 드러납니다. 사실 심도 효과 자체는 12-40mm F2.8의 40mm 망원 촬영이 더 크지만 단렌즈는 휴대성과 이미지 품질에서 확실한 이점이 있습니다.
진짜 여행, 그 순간의 기록
그렇게 카메라와 렌즈에 어느정도 적응하게 되면 그 다음부턴 장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진짜 여행의 기록은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형태가 보이고 색에 반응하게 됩니다. 카메라의 버튼을 찾고 손으로 더듬는 데 감각을 소비하지 않게 될 때부터 마음에 드는 장면들이 나오더군요. 저는 어디든 여행을 떠나면 하루, 이틀이 지난 후부터 본격적인 기록은 하루, 이틀이 지난 후부터 시작합니다. 이 날 하루의 시간은 그러기엔 너무 짧았지만, 그래도 단렌즈가 가진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요즘 카메라 다들 좋다지만 그럼에도 내 맘에 꼭 드는 카메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때보다 눈이 높아진 탓인지 아쉬움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네요. PEN-F와 17mm렌즈 역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디자인과 인터페이스, 기동성에서 현재까지는 제가 원하는 해답에 가장 가까운 구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곧 떠날 여행을 함께할 계획입니다. 그때까지 좀 더 익숙해지고 친해져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