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카메라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가까운 나라 일본,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 5박 6일을 보내기엔 따분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떠나있는 동안 분비되는 독특한 호르몬은 매일 같은 길을 걸어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한다거나 여행에 미쳐 있다고 저를 소개하지 않지만 낯선 도시를 걷는 동안 다른 어떤 것에서도 느낄 수 없는 행복을 느끼는 것은 분명합니다.
되도록 새 카메라와 함께 여행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것 못지 않게 새 카메라를 만나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에요. 하지만 이번 여행은 도시도 카메라도 익숙한 것들이었습니다. 벌써 세 번째인 도시 후쿠오카, 그리고 세 번째 여행을 함께하게 된 카메라 PEN-F. E-M1 Mark II가 여행용으로 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PEN-F를 선택한 것을 보면 역시 저는 이 카메라의 멋진 디자인과 특유의 가벼움에 더 끌리는 것 같습니다. 가볍게 여행하고 싶어 렌즈도 전천후 렌즈 12-100mm F4 IS PRO 대신 작고 가벼운 단렌즈 두 개 17mm F1.8, 12mm F2.0를 챙겼습니다. 가벼운 슬링백 속에 카메라와 렌즈를 모두 넣어도 부담이 없더군요.
DSLR 카메라의 재미에 푹 빠져있을 때, 욕심을 부려 세로그립 일체형의 DSLR 카메라와 묵직한 줌렌즈를 들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거기에 백팩에 여분의 망원 렌즈와 광각 렌즈를 넣어 종일 매고 다녔죠. 무게가 족히 5kg은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여행을 떠올려 보면 사진은 열심히 찍었지만 정작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어깨에 짊어진 장비 무게까지 겹쳐 내내 땀흘리고 지쳐있던 것이 먼저 기억납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제 여행용 카메라는 풀 프레임 DSLR 카메라와 무거운 렌즈들이었지만, 요즘은 조금씩 카메라 장비를 다이어트 하고 있습니다. 작품사진을 남겨오는 것보다는 여행을 즐기며 이야기를 기록해 두는 보조용으로 카메라와 사진을 사용하게 되었거든요. 최신 미러리스 카메라들의 화질과 성능이 그때보다 크게 좋아진 것도 중요한 변화의 이유입니다.
가벼워진 만큼 즐거워진다.
올림푸스 PEN-F의 무게가 배터리 포함 약 427g, 두 개의 단렌즈를 합친 무게가 약 250g이니 전부 합쳐도 약 677g에 불과합니다. 예전에 사용하던 풀 프레임 DSLR 카메라가 본체 무게만 800g이 넘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깃털같은' 가벼움입니다. 미러 박스를 제거한 미러리스 카메라 구조 덕분에 부피는 무게보다 더 극적으로 줄었습니다. 아쉽게도 재킷 주머니에 넣을 정도로 작지는 않습니다만, DSLR 카메라 전용 가방을 사용하지 않고도 가벼운 크로스백은 물론 에코백에도 다른 소지품과 함께 넣어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 여행을 함께했던 E-M1 Mark II와 M.ZUIKO DIGITAL 12-100mm F4 IS PRO 렌즈의 조합과 비교해도 무게가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물론 E-M1 Mark II와 12-100mm 렌즈는 AF 성능과 연사, 4K 동영상, 광각-망원을 아우르는 고배율 줌 등 여행용으로 만능에 가까운 조합이니 직접 비교는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 E-M1 Mark II와 PEN-F는 '사진을 위한 여행 vs 여행을 위한 사진' 정도로 평가합니다. 전자가 마음 먹고 사진을 찍으러 떠나는 여행에 추천하는 조합이라면 PEN-F와 단렌즈 조합은 여행을 만끽하며 순간을 담기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PEN-F와 12mm :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의 사진
오키나와 남부의 보석같은 해변 미라부(新原ビーチ), 신의 익살인지 바위가 반쯤 가린 좁은 입구를 들어서며 저멀리 보이는 하늘과 바다에 말 그대로 심장이 쿵 하고 내려 앉았습니다. 눈을 돌릴 수 없던 그 장면에 발을 재촉하며 다가가는 것과 동시에, 어깨에 맨 작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습니다. 5박 6일 중 가장 감격적인 이 장면에서 작고 가벼운 카메라는 마치 저와 함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 PEN-F | 12mm | F6.3 | 1/1600 | ISO 200 -
- PEN-F | 12mm | F6.3 | 1/1600 | ISO 200 -
오키나와의 풍경은 주로 PEN-F와 12mm F2.0 렌즈로 촬영했는데,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가벼운 이 조합은 35mm 환산 24mm의 광각을 왜곡없이 즐길 수 있어 올림푸스의 수많은 카메라와 렌즈 중 여행용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입니다. 인적이 드문 미라부 해변의 탁 트인 풍경을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담아주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해변에 머물며 백사장 위를 가볍게 뛰거나 작은 배가 모인 풍경으로 달려가며 꿈꿔왔던 오키나와에서의 순간을 만끽하는 동안, 목에 건 PEN-F와 12mm F2.0가 걸음과 함께 가볍게 찰랑이며 흥을 돋우었습니다. 짝 없이 혼자였다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일 정도로 즐거운 순간이었어요.
- PEN-F | 12mm | F4 | 1/3200 | ISO 200 -
처음 찾은 오키나와에선 대부분의 사진을 12mm 렌즈로 촬영했습니다. 이제 제법 익숙한 것들이 많은 후쿠오카보다 더 넓게, 많이 담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몹시도 화창한 오후에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 왕국의 '슈리 성'에 다녀왔는데, 제법 큰 규모의 성과 맑은 하늘을 동시에 담기에 12mm 렌즈가 무척 좋았습니다. 낮기온은 30도를 훌쩍 넘어 한여름처럼 무더웠는데, 종종 그늘 아래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목에 건 카메라가 무겁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 오키나와 슈리 성 풍경 -
- PEN-F | 12mm | F2 | 1/8000 | ISO 200 -
거리 스냅 사진에도 PEN-F와 12mm F2 렌즈 조합을 좋아합니다. 작은 크기 덕분에 거리 위 사람들이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고 35mm 환산 24mm의 광각은 17mm F1.8 렌즈의 차분한 시선과 달리 원근감을 강조한 다이내믹한 연출을 가능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해변과 거리, 카페와 식당 등 어디에서나 망설이지 않고 사진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 PEN-F | 12mm | F6.3 | 1/800 | ISO 200 -
PEN-F와 17mm : 짜릿한 순간의 기록
- PEN-F | 17mm | F1.8 | 1/60 | ISO 250 -
35mm 환산 약 35mm의 초점거리를 갖는 M.ZUIKO DIGITAL 17mm F1.8 렌즈와 PEN-F의 조합은 어느덧 먹기 위해 찾는 곳이 되어버린 후쿠오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과 비슷한 화각에 F1.8의 근사한 아웃포커스 효과가 더해져 음식 사진을 찍기에 무척 좋거든요. 게다가 식당에서 눈치 보지 않고 실컷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크기, 가벼운 무게 역시 장점입니다. 오키나와에서 주로 12mm 렌즈로 풍경을 담았던 것과 달리 후쿠오카에서는 주로 17mm F1.8 렌즈로 맛깔나는 음식들을 담았습니다.
2000만으로 이전보다 넉넉해진 화소와 단렌즈 특유의 고화질은 눈으로 먼저 즐기는 음식들을 선명하게 담아줬고, F1.8의 밝은 조리개 값 덕분에 어둑한 식당 조명에서도 깨끗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다녀온 어떤 여행보다 다양하고 푸짐한 식사들이 이어진 이번 여행, 덕분에 앞으로 당분간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식욕을 억제할 수 있겠습니다.
- PEN-F | 17mm | F1.8 | 1/60 | ISO 1000 -
사진보단 여행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니까.
올림푸스 PEN-F와 함께 세 번째 여행을 다녀오니 제가 여행을 앞두고 왜 그렇게 카메라의 크기와 무게에 집착했는지, 작은 카메라를 좋아하는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언젠가 했던 말처럼 가벼운 카메라는 가벼워진 무게만큼 사진에서 여행 그 자체로 추가 기울게 하고, 종종 어깨에 매단 존재를 잊을 듯한 가벼움에 여행이 더욱 즐거워지거든요. 싱가포르 여행에서 E-M1 Mark II와 M.ZUIKO DIGITAL 12-100mm F4 IS PRO 렌즈가 사진이 주인공인 여행에 어울렸다면, PEN-F의와 단짝 렌즈인 17mm F1.8, 12mm F2.0은 가벼운 무게와 고화질로 도시와 여행, 시간과 장면을 더 진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았냐고 물으면 그저 다른 의미로 양쪽 모두 좋았다고 할 수 밖에요.
큰 카메라가 조금 더 그럴듯한 사진을 만들어줄지는 몰라도, 의미있는 장면을 담는 데에는 이 정도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PEN-F와 이 두 렌즈는 그래서 누구에게든 여행용으로 가장 먼저 추천하게 되는 조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