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개월, 365일.
일직선으로만 흐르는 시간을 그저 편의에 따라 구분해 놓은 것이지만, 이제 사람들은 꼭 그 틀에 맞춰 시간이 흐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시간, 계절에 같은 이름을 붙여 똑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꼭 다시 그 시간이 돌아온 것 처럼.
내내 잊고 있다가도,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저도 모르게 이곳이 떠오릅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매서웠고, 그래서 다녀온 후 며칠동안 열병을 앓아야 했었지만, 그 기억이 겨울이면 으레 이 곳으로 발길을 이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꼭 그날처럼 매서웠던 2월의 어느날, 두물머리에 다녀왔습니다. 실컷 걷고 또 찍고 싶은 날 찾게되는 곳입니다.
양수역에 내려 일부러 두물머리까지 걸어갑니다. 약 2.4km의 상당한 거리인데, 상점들이 즐비한 대로 뒷편으로 펼쳐진 산책로가 두물경 못지않게 매력적입니다. 때는 입춘이 지나 봄으로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 있지만, 나무 난간 너머 강은 아직 꽁꽁 얼어있고, 그 위를 며칠 전 내린 눈이 한 꺼풀 덮었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 차가운 공기에 풍경은 텅 비었지만, 간간히 등산복 차림의 남녀가 하나 둘 지나가며 눈 앞 풍경에 온기를 더합니다.
멀리서 사진을 찍은 후 샛길을 통해 산책로에 들어섰고, 곧 끝과 마주한 것이 아쉬워 다시 처음 들어선 자리로 돌아가 다시 걸었습니다. 찬바람에 시린 손을 내내 외투 주머니에 넣어야 했지만, 주머니 속 온기만으로도 배시시 웃음이 나온 걸음이었습니다. 머리칼 휘날리는 바람이 잠시 멎으면, 그것대로 또 다행이라며 콧노래를 부른 산책이었습니다.
그렇게 두물경까지 쉼 없이 걷는동안 좌우로는 꽁꽁 언 강과 개울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 마른 풀이며 발 둘 곳 찾는 새들이 간혹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어줬지만, 차가운 공기의 색 때문에 오히려 더 쓸쓸해 보였습니다.
얼어붙은 강은, 기억 속 풍경보다 훨씬 더 좁았습니다.
두물머리의 이 풍경을 보면, 군 전역 후 첫 아르바이트비로 산 DSLR 카메라를 들고 왔던 가을날이 떠오릅니다. 유행이 한참 지난 옷에 못생긴 검정색 사각형 가방을 어깨에 매고 이쯤 어딘가의 돌뿌리에 걸터앉아있던 모습이 일이년 전처럼 생생합니다. 외출을 좋아하지 않던 제겐 제법 긴 여행이었던 그 날 이후,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리 멋진 풍경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찾아오면 사진보단 그저 그 날과 그 전 언젠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다 오는 게 전부이면서도 매년 꼬박꼬박 이곳을 찾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저는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딘가로 다시 떠나고 싶다는.
몇 년 전에 생긴 액자 형태의 구조물은 두물머리를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올 때마다 조금씩 바뀐 모습을 발견하지만, 그래도 제가 아는 장소 중 가장 느릿느릿 변해가는 이 곳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데, 늘 혼자인 저는 이렇게 텅 빈 프레임으로 담습니다. 물론, 이대로도 꽤나 근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구름이 적당하게 박힌 하늘 덕분에 겨울 두물머리로 떠올릴 장면이 하나 생겼습니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만나는 두물경까지는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처음 이 곳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들어서기 힘들었던 길에 지금은 반듯한 산책로가 생기고 곳곳에 벤치가 놓여 제법 공원 느낌이 납니다. 물론 이 날은 겨울이 한창이라 나무는 앙상하고 벤치도 쓸쓸해 보였지만 다행히 햇살이 걸음마다 내려 괜찮은 산책길이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사람 하나 없었던,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즐거웠던.
그렇게 한바탕 두물머리와의 재회를 만끽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어딘가 허전했던지 다리를 건너 세미원을 훑고 왔습니다. 세미원은 연꽃이 필 때 몇 번 찾은 적이 있는데, 겨울에는 사람이 떠난 시골 마을처럼 녹이 슨 장식물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동절기 세미원의 입장료는 이천원 할인된 삼천원인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습니다. 세미원을 통해 다시 양수역으로 걷는 동안 이년여만의 재회를 다시 곱씹고, 이 곳에서 걱정 한보따리를 털어 놓았음을 후련해하며 짧은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집에 돌아오기 전에 밥집보다 찻집에 먼저 들러 뜨거운 차 한 잔을 한참이나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차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붙잡고 있다가 한 모금 들이켜 속을 달랬습니다.
풍경에, 재회의 기쁨에 손이 어는 것도 모르고 서너 시간을 있었습니다.
녹은 손으로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볼 때까지도 세상은 겨울이었지만, 사진 몇 장에서 봄소식을 발견합니다.
눈으로 볼 때는 그것마저 겨울이었는데, 신기한 일이죠.
다시 한 번 그것들을 돌아보는 오늘, 예년보다 오륙 도는 포근하다는 일기예보가 귓가에 들려옵니다.
아무래도, 겨울이 곧 끝나려나 봅니다.
다 지나가버리기 전에, 다시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짧게나마 여행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진정한 여행은 너를 숙성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