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좋은 무료전시 소식을 듣고 한남동 디뮤지엄에 다녀왔습니다.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ès)에서 개최한 'Wanderland 파리지앵의 산책'입니다. 워낙에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전시에다 관람료도 무료이다 보니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여성분들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에르메스에서 개최한 전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고가 명품 제품들이 즐비한 전시를 떠올렸지만 실제 전시에서는 에르메스 브랜드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전시는 '산책'을 테마로 19세기 파리의 거리, 미술관, 지하철과 펍 등을 재현한 전시실을 말 그대로 '거닐며 즐기는' 즐거움을 전달합니다. 비싼 명품 제품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에르메스가 이끈 혹은 녹아있는 파리지앵의 라이프스타일을 감상하는 기회입니다. 각 전시실은 마치 공간 여행을 하는듯 변화무쌍하게 꾸며져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첫번째로 보게되는 방은 사방으로 도는 작은 조명들 때문에 아찔한 듯 어지러운 느낌이 듭니다. 입구에 들어서며 관람객들은 돋보기가 달린 긴 지팡이를 받게 되는데 전시장 곳곳에서 이 지팡이가 유용하게 활용됩니다. '산책'과 '자유'를 테마로 한 전시를 시작하는 방 벽면 가득 지팡이 그림이 그려진 것이 인상적입니다. 방 한켠에는 에르메스에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지팡이가 걸려 있습니다. 일반적인 명품 브랜드의 전시와는 어딘가 다른 느낌이 드는 시작입니다.
에르메스 상자 가득한 옷장 안에 들어서면 Wanderland로의 산책이 시작됩니다.
옷장 속부터 시작되는 복도는 길고 어둡습니다. 양쪽에는 에르메스 가방들이 즐비합니다. 아마 에르메스의 제품들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등장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멋진 가방이 가득한 옷장 속을 고개를 처박고 구경하는 기분이랄까요.
벽에 걸린 저 말 머리상은 가만히 보고 계시면 순간적으로 혀를 내밀어 '메롱'하고 다시 무표정을 짓습니다. 혹시 방문하시면 가만히 살펴보세요.
지팡이로 보아야만 볼 수 있는 환상 세계
전시장 곳곳에는 자유, 욕망 등 추상적인 단어들이 적힌 흰 원이 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서 받은 지팡이는 바로 이 원을 위한 것입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욕망의 세계가 지팡이 끝에 달린 돋보기를 갖다 대는 순간 펼쳐지는 것이죠.
'독창성'이란 단어가 적인 흰 원에 지팡이 끝 렌즈를 가져가면
이렇게 환상적인 그림이 나타납니다. 전시장 곳곳에 이렇게 숨은 그림을 찾을 기회가 많이 있으니 관람 전에 참고하시면 더 즐거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 뒤로도 전시장은 다양한 테마별로 19세기 파리지앵의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합니다. 낮과 밤이 바뀌기도 하고 가로등이 천장부터 거꾸로 서 있기도 합니다. 옛 파리 지하철을 재현한 복도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 마치 먼 곳으로 여행을 온듯 독특한 장면이 담기기도 합니다.
전시실 수는 많지 않습니다. 전체 관람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3-40분 정도면 모두 볼 수 있을 정도로 긴 전시가 아닙니다. 그리고 관람객이 무척 많아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가면 인파에 떠밀려 겨우겨우 관람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유로운 관람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지만,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장면과 오브젝트들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산 우리들은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라 한번쯤 고생을 감수하고 찾을 가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고풍스러운 소품과 분위기들이 19세기 파리 그리고 에르메스에 의해 직접 만들어지고 실존했던 것들이라는 의미가 전시를 즐겁게 합니다.
어두운 실내 조명 때문에 '인증샷' 찍으러 가기 좋은 전시는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 않겠죠.
전세계 사람들이 동경하는 파리지앵의 라이프스타일을 눈치보지 않고 빤히 쳐다보고 또 볼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 제목 그대로 어느 영화 속 멋진 거리 혹은 동네를 가볍게 산책하고 온 것 같습니다.
'Wanderland 파리지앵의 산책' 전시는 12월 11일까지 진행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시간내서 다녀오세요.
http://lesailes.hermes.com/kr/ko/wander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