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사추이와 몽콕 야시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발길을 돌려 센트럴로 향하며 든 생각은 '소호가 기대보다 못하면 정말 화가 날 것 같다!' 였습니다. 그래도 홍콩에 왔는데, 게다가 첫 여행인데 친구들이 그렇게 사진을 보내며 자랑했던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한 번 밟아봐야 하지 않겠냐, 소호도 한 번 걷고 그 에그 타르트도 한 번 먹어봐야 하지 않겠냐며 돌아섰거든요. 그래도 다들 좋은 기억으로 이야기해 준 곳이니 제 기대만큼을 하겠지 하며 센트럴을 지나 소호까지 쭉 걸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 홍콩은 조금만 여유를 두면 주요 관광 스폿을 걸어서 이동할 수도 있더군요. 물론 시간보다 체력이 관건이지만.
사실은 쭉 걸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시내 일부 지역에서 운행 한다는 트램을 타고 싶어서 역을 찾았는데, 지도를 보고 트램 정류장을 검색하고 목적지인 소호를 찾아보니 걸어가는 것이 오히려 빠르더라고요. 순간 '트램의 낭만'이냐 '소호의 밤'이냐 잠시 고민했지만 트램은 프라하에서 더 멋진 풍경으로 타 보았으니 되도록 빨리 소호에 닿아야겠다며 걸었습니다. 코즈웨이 베이를 걸으며 느낀 것인데 제가 걸었던 홍콩 거리 대부분이 너무나도 화려한 번화가였습니다. 명품 숍들이 즐비하고 조명이 화려해서 이 도시 전체가 밤에도 환하게 빛나는 느낌이었습니다. 덕분에 이것들을 감상하다 소호로 가는 걸음이 더 늦어졌어요.
아하,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이 감탄사는 사실 실망에 가깝습니다. 이 곳에 오기 전 '홍콩'하면 가장 먼저 떠올린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 도착했고, 신나서 한참동안 사진을 찍은 후에야 몸을 실었습니다. 쉬지 않고 한참을 올라갈 줄 알았던 에스컬레이터는 생각보다 구간이 짧고 중간중간 걸어야 하는 통로가 많았고 제겐 홍콩 특유의 낭만보다는 우리가 백화점에서 흔히 이용하던 걸음보다 빠른 이동수단에 가까웠습니다.
- 걸어 올라가기는 힘들잖아요 -
밤이라 더욱 그랬는지 몰라도 이 에스컬레이터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타는 그리고 연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저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변 대부분이 현지 사람이었는데 바깥 한 번 보지 않고 무심하게 올라 가더군요. 오른쪽 계단을 보니 그래도 걸어 올라가는 것보다는 낫다 싶지만 제가 기대했던 에스컬레이터의 낭만, 영화같은 장면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아쉬웠습니다.
- 열한시가 가까워 오는 심야라 더 그랬겠지만 바깥 풍경도 별 것 없었어요 -
소호부터 란 콰이 펑까지, 꿈 같았던 밤거리 풍경
그렇게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금방 싫증을 느낄 무렵 소호에 도착했고 그 분위기에 새삼 놀랐습니다. 멋과 낭만의 거리라고 생각했던 소호는 술 마시는 사람들과 담배 연기로 가득했고 술집만이 문을 열어 한결 화려한 분위기가 주말의 이태원 경리단길을 연상시켰거든요. 문득 '이건 내가 원하던 마지막 밤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와 다른 곳에 이동 하기는 시간이 늦었으니 조금 더 걸어 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날의 선택이 꽤나 괜찮았다고 자평 합니다. 소란함 속 어딘가에 여유가 있고, 깊이 들어갈 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보이는 이 밤거리 풍경은 굳이 골라 들어가 술을 마시지 않아도 그저 걷고 감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좋았습니다.
[ 그날밤, 소호 그리고 란 콰이 펑의 밤거리 ]
그렇게 걷다보니 걸음이 란 콰이 펑까지 이어졌습니다. 사실 이 거리의 흥에 휩쓸려 그리고 조금이나마 조용한 곳을 찾아 걷다보니 어느새 란 콰이 펑에 닿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네요. 두 골목의 차이를 잠시 지나쳤을 뿐인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두 곳 모두 외국인이 참 많았고 다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하나같이 이 소란스러운 풍경에 익숙해 보였고 심지어 즐기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저는 눈에 보이는 장면에 빈 틈 없이 가득한 수많은 이야기들에 감탄해 연신 셔터를 눌렀습니다. 지칠만도 한데 이 풍경들이 너무 좋아서 말 한마디 없이 걷고, 찍었습니다.
사실 다녀와서 사진을 보면서도 이 곳이 소호인지 란 콰이 펑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두 거리 모두 클럽 음악과 담배 연기, 외국인의 자유분방한 모습들로 가득했고 제 눈에는 크게 다르지 않은 그냥 '홍콩의 밤거리'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던 것이 맞겠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긴 이 사진만은 똑똑히 기억이 납니다. 이제 어디라도 앉을 곳을 찾자며 란 콰이 펑 끝을 찾아 걷던 중 발 아래로 보이던 풍경이 인상적이었거든요. 비정상적으로 노랗고 붉은 조명과 적당히 낡은 건물의 형태, 마침 잔뜩 막혀있는 차들과 사람들의 표정들이 이날 밤의 분위기를 한 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습니다.
밤거리는 쉬지 않고 '나 좀 찍어봐' 하며 멋진 포즈를 잡았지만 그보다는 이 시끄러운 소리와 담배연기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점점 좁고 어두운 골목을 찾아 다녔고 다행히 란 콰이 펑 아주 끝자락에 있는 작은 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깐 앉았다가 다시 저 시끄러운 밤거리로 파고 들겠노라 다짐 했지만 막상 노천 테이블에 앉아 칭다오를 한 모금 들이키니 오늘은 이만 마무리 하자 싶습니다.
그날밤, 혼란스러운 밤거리를 함께 걸어준 일행과 맥주 한 병씩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 이야기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얼굴도 모르던 사람들이 어느새 이렇게 앉아 얕게나마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꽤 좋았던 기억입니다. 그래서 중간중간 이야기가 끊기고 서로 스마트폰만 보더라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여기서 그냥 밤 새 맥주나 마실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곳이 너무 좋아서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여유있게 택시를 타고 숙소까지 가려 했지만 열두시가 넘으니 택시 기사들은 표정부터 달라져 당연하게 승차 거부를 했고 혹 협상에 나서더라도 여지없이 서너배의 요금을 부르며 배짱을 부렸습니다. 문득 한국 택시 시스템이 참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여긴 아직 이런 게 당연한가 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신히 평소 요금의 세 배를 내기로 합의하고 택시를 탔습니다. 빠져 나오는 길, 택시마다 붙어있는 사람들을 보니 그나마 이렇게라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게 다행이다 싶습니다. 한바탕 소란을 보내고 나니 이틀간의 바쁜 일정을 보내며 쌓인 피로가 몰려와 택시 좌석에 등을 기댔습니다. 이 화려한 밤 풍경을 내일부터는 볼 수 없겠다 생각하니 내심 아쉽습니다. 어차피 택시타고 나올거 조금 더 늦게까지 놀 것을 하며 아쉬워 합니다.
매우 아쉽게도 이렇게 홍콩에서의 마지막 밤이 끝났습니다. 이제 막 홍콩이 편해지려고 하는데 말이에요.
2박 3일, 다녀오고 나니 오히려 더 홍콩에 가고 싶어지는 짧은 여행이었습니다. 터무니 없이.
[2015 겨울, 홍콩 여행] 전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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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심을 깨운 오션 파크의 축제 - 홍콩 오션 파크의 크리스마스
#3 이것이 크리스마스 센세이션! 홍콩 오션 파크의 만화경 아이스 쇼
#4 오션 파크 그랜드 아쿠아리움을 배경으로 한 환상적인 디너 @넵튠스 레스토랑
#5 현대식 인테리어의 세련된 호텔 L'Hotel Island Sou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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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홍콩 오션파크를 즐기는 비결 1/2, 워터 프론트(The Waterfr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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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림같은 뷰의 베이뷰(The Bayview)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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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홍콩 타임스퀘어 Pak Loh Chiu Chow 레스토랑에서의 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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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마지막 밤. 소호 그리고 란 콰이 펑, 그날의 분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