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최근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를 통해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 흘러 나왔습니다. 사진 애호가들에겐 꿈, 아니 꿈에서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F 0.75의 믿을 수 없는 조리개 값을 갖는 렌즈를 개발 중이라는 소식입니다. 현재 개발 중이라는 이 렌즈는 네덜란드의 광학 회사에서 실제 제품을 생산 중이며 35mm 풀프레임 카메라에서 사용할 수 있는 50mm 단초점 렌즈와 올림푸스/파나소닉의 마이크로 포서드 카메라에 사용할 수 있는 42mm 단초점 렌즈로 발매될 예정입니다. 뻥 뚫린 듯한 대구경 렌즈와 육중한 체구가 밝은 렌즈임을 보여주고 있지만 F 0.75라는 조리개 값은 상상한 적이 없어 놀랍기만 합니다.




"렌즈의 초점거리/입사동공의 직경"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수식은 렌즈의 F값을 설명할 때 나오는 용어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사용자들은 렌즈의 '빛을 받아들이는 능력' 혹은 '얼마나 더 배경이 날아가는가'로 떠올리는 숫자입니다. 이 F값이 낮아질수록 빛을 많이 받아들여 셔터 속도를 확보하기 쉽고 낮은 심도 표현으로 배경 흐림을 연출하기 용이합니다. 반면에 그만큼 렌즈 크기와 무게가 증가하고 무엇보다 '가격'이 무시무시하게 올라가죠. '렌즈 기술의 척도'로도 불리는 낮은 F값을 위해 많은 광학 회사에서 F1.2 혹은 그 이하의 밝은 렌즈를 제조하고 있으며 현재 시장에는 F 0.95 정도의 렌즈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흔치 않고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일례로 라이카 M 마운트용 50mm F 0.95렌즈인 Noctilux-M 렌즈는 렌즈 가격만 천만원이 넘어가니 이 '밝은 렌즈'가 갖는 힘을 다양한 의미에서 느낄 수 있겠습니다. 킥스타터를 통해 발표된 50mm F 0.75 렌즈는 이 F 0.95 보다도 더 밝은 F 값을 갖는 렌즈입니다.




킥스타터 페이지에 게시된 렌즈의 사진을 보면 역시나 극도로 밝은 조리개값을 구현하기 위해 그야말로 '뻥' 뚫린 렌즈 설계가 적용됐습니다. 빛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기 위한 구조로 F 0.75의 밝은 조리개 값에서의 결과물이 사뭇 기대되는군요. 더불어 크기와, 무게 그리고 가격도 무척 궁금한 렌즈입니다.



F 1.0 이하의 '비현실적으로' 밝은 렌즈는 뛰어난 해상력이나 휴대성 등 일반적인 렌즈의 평가 요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입니다. 반면에 '이 렌즈만이 가능한 독특한 표현'에 있어서는 상당히 엄격한 기준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아무래도 극단적인 밝기에서는 선명한 결과물보다는 개방 촬영에서 얻을 수 있는 독특한 심도 표현과 피사체 윤곽선 등의 묘사 등이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더불어 최대 개방 촬영에서 배경의 광원이 연출하는, 흔히 '보케'라고 부르는 '빛망울'의 크기와 모양, 느낌도 중요한 평가 요소입니다.


해당 렌즈의 소개 페이지에는 이 렌즈로 촬영한 샘플 이미지 몇 장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인물을 클로즈업 촬영한 결과물에서는 개방 촬영 특유의 부드러운 묘사와 매우 얕은 심도가 드러납니다. 역시나 '쨍'한 화질은 아니지만 몽환적인 표현이 어쩌면 이 렌즈의 개성이 될 수 있겠습니다. 반면 보케는 상당히 선명하고 아름다운 원형입니다. 보케 촬영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F 0.75의 값에 아름다운 보케를 만드는 이 렌즈가 새삼 더 놀랍게 보일 수 있겠습니다.




화질 다음 관건은 '가지고 다닐 수 있는가'입니다. 대구경 설계 때문에 크기와 무게가 크게 증가할 수 밖에 없는데, 이 RAYXAR 50mm F 0.75 렌즈는 F 0.95의 라이카 Noctilux 렌즈와 비슷한 혹은 더욱 작은 크기에 더욱 낮은 F 값을 실현했다는 것이 자신감 넘치는 개발팀의 설명입니다. 라이카 M 바디에 마운트한 이미지를 보면 역시나 렌즈가 카메라보다 더 커 보이는 '가분수'지만 비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한번 들고 나가볼까?' 싶은 정도랄까요, 하지만 지금 저 모양새라면 경통이 뷰파인더를 가려 뷰파인더는 사용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밝은 F 값에 소형화까지 하려다보니 독자적인 광학 설계가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후면 렌즈군이 상당히 많이 후퇴한 형태로 렌즈가 설계 됐습니다.



몇몇 샘플 이미지를 유심히 확인하면 역시나 F 1.0 이하의 렌즈에서 흔히 발생하는 낮은 콘트라스트와 소프트한 이미지 경향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왼쪽 이미지는 마치 소프트 필터를 적용한 듯한 연출로 영화 속 한 장면같은 느낌이고 오른쪽은 마치 손가락으로 문질러 뭉갠 듯한 배경 처리와 눈 외에는 모두 '블러'처리된 듯한 낮은 심도가 인상적이네요. 실제로 이 렌즈는 범용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이런 독특한 연출이 필요한 사진 및 영상 작업에 주로 활용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개발팀에 의해 엄선된 '최상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겠지만 F 0.75라는 낮은 F 값에 비해 이미지 품질은 그런대로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개발팀에서 공개한 100% 확대 이미지, 3600만 화소 이미지를 100% 확대한 결과물이라고 하는데요, 정확한 F 값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밝은 개방 촬영에서 발생하는 색수차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묘사 역시 뛰어납니다. 이 이미지로만 평가하면 상당한 수준의 화질입니다.



함께 공개한 이 이미지는 개방 촬영에서 우려되는 주변부 광량 저하, 즉 '비네팅' 현상이 이 렌즈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제시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주변부 네 귀퉁이가 모두 검정색인 이미지라 정확한 판단의 근거는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이 증폭되긴 하지만요.


현재까지 선보인 이 렌즈의 '장점'들만 보면 충분한 경쟁력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역시 상세히 살펴보면 이 F 0.75 값을 위해 희생한 요소들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는데요, 렌즈 조작의 기본이라 하는 조리개와 초점링의 실종입니다. 이 렌즈는 F 0.75 최대 조리개로만 촬영할 수 있는 렌즈로 조리개를 수동으로 조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조리개를 변경하기 위해서는 아래 사진과 같은 링 형태의 조리개 장치를 렌즈 앞쪽에 고정해 원시적으로 빛의 양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더 중요한 '초점링'까지 빼버렸습니다. 따라서 이 렌즈는 원하는 초점을 위해 사용자가 직접 앞뒤로 카메라를 움직여야 하는 '고정 초점' 렌즈입니다. 1-2m 거리에서 촬영해야 한다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설명을 보며 F 0.75라는 숫자가 줬던 환상이 깨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한정된 몇몇 촬영에서 이 렌즈는 F 0.75라는 상징적인 의미만으로도 큰 역할을 해내겠지만 그 '상징성'을 빼면 과연 200만원이 넘는 가격을 주고 구매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합니다.


이런 것을 보고 '고마웠어, 잠시 꿈을 꾸게 해 줘서'라고 해야 할까요?


하지만 분명 이 F 0.75 렌즈는 꼭 실제 제품으로 출시 됐으면 하는, 그리고 결과물이 무척 궁금한 렌즈입니다.

언젠가는 이런 밝은 렌즈가 보편화될 날도 올까요? 최근 올림푸스를 비롯해 몇몇 브랜드에서 F1.2의 밝은 렌즈를 다수 출시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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