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여행 둘째 날, 1년 만이라기엔 너무 짧았던 해운대와의 재회를 마치고 달맞이 길로 향했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지인들이 하나같이 추천하는 곳이기도 했고, 매 여행 때마다 여러 사정 때문에 눈에 보이는데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라 궂은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달맞이 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걷는 내내 '여기가 달맞이 길인가', '사람들이 추천하던 그 풍경은 어떤거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딘가 '멋지려는 듯', '멋져지려는 듯'한 풍경들이 계속되어 발걸음을 재촉하지만 제 기대가 컸던 탓인지, 마음 가득 들어오는 달맞이길 만의 장면은 이 날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팔각정을 보고는 이 길이 달맞이 길이 맞다는 것을 알았지만 길 너머로 보이는 멋진 바닷가 풍경은 우거진 수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고, 길에 늘어선 카페들도 글쎄요 저에겐 크게 와닿지 않더라구요. 나중에 듣고 보니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이 길 전체가 봄 축제장이 된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 때 다시 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날씨 탓에 더더욱 기대 이하였던 달맞이 길 산책을 마무리하며 내려오던 길에 발견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해운대 앞바다를 끼고 길게 뻗은 기찻길이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눈에 들어오니 기억도 다시 떠오르더군요. 바다를 따라 걷는 기찻길, 달맞이 길 말고 애초에 저 곳을 갔어야 했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예정에 없던 새로운 산책이 시작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려가는 길에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길 위 산책길과 철길의 거리를 보고, 그리고 누군가 걸어 내려간 듯한 수풀길을 따라 내려갔는데 밀렵꾼들이 다닐 법한 험한 길이었는데다, 그마저도 중간에 끊겨 버려 마지막 1/3 정도는 거의 미끄러져 구르듯 내려왔거든요. 순간 '이런 곳에서 조난을 당하는 거구나'라는 주책맞은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히 무사히 -무사히라도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산을 타고 내려와 한참을 웃었습니다. 내내 여유로울 줄 알았던 이번 여행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어쨌든 도착했으니 다행이라며, 그리고 달맞이 길 초입까지 돌아내려가는 것보다 그래도 빨리 내려왔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이 '특별한 길'을 한 번 둘러봅니다. 아, 그 전에 흙 묻는 바지와 나뭇가지가 꽂혀 있던 머리를 꽤 오래 털어줘야 했죠.





이 풍경을 보니 고생하며 굴러내려왔던 시간이 영 아깝지만은 않더군요. 해운대나 광안리 바닷가에선 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바다, 게다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 바닥이 훤히 보일만큼 더욱 순수해 보입니다. 사람을 할퀴기 위해 있는 저 철창만 아니면 제주 바다 못지 않은 풍경이 되었을텐데요.


어쨌든, 우연히 부산의 보석같은 산책길을 발견한 즐거움에 원래 목적지였던 해운대라는 글씨를 이정표에서 보고도 반대쪽으로 향합니다. 이 길로 계속 걸으면 어떤 곳에 도착하게 될까, 가는 동안 어떤 장면들을 보게 될까 기대하면서요.





그래요, 아무도 없이 평온한 바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같은 색인 풍경.


이걸 찾아 온 거였는데, 자칫 못 보고 갈 뻔했습니다.





바다, 그리고 철길.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감성'을 이끌어내는 대표적인 대상이죠.

그래서 바다를 보며 걷는 이 철길은 저도 마음에 들었지만, 많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아마 벚꽃이 피면 이 곳에도 사람이 가득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곳이라면요.

바다에 눈을 팔다 넘어지기 쉬울 정도로 매력적인 길에, 사진 찍기에도 좋은 배경이니까요. 이 때쯤 저는 '달맞이 길'이 기억에서 지워졌어요.






저 멀리 보이는 해운대와 동백섬의 풍경, 꽤 멀리 걸어왔는데, 앞을 보아도 길 끝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전엔 실제 기차가 다녔던 길이니 다음 역까지 꽤 오래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은 오후지만 곧 해가 질 것만 같은 흐린 하늘에 자칫 비라도 오면 어떡할까 싶어서 왔던 길을 돌아보지만, 그래도 계속 걸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끝을 모르고 걸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한 시간 정도를 걸었더군요. 그리고 운 좋게 꼭 보고 싶었던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철길 끝에는 - 짧은 제 산책길의 끝- 눈대중으로도 그 수를 셀 수 있는 집이 모인 마을이 있었습니다. 사람도 제법 드는지 관광객을 위한 식당도 있는 것이 재미있다며 걷던 길 안쪽에는 오래된 항구 '청사포'가 있었습니다. 빨간색과 하얀색 두 개의 등대, 정박해 있는 배들을 보니 중간에 지루하긴 했지만 여기까지 걸어온 것이 잘했다 싶습니다. 달맞이 길 꼭대기에서 두 등대를 보며 저 곳이 오늘 목적지가 아니었던 것이 아쉬웠거든요.


그리 반기는 표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을 어귀에 이렇게 인사할 상대가 있으니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렇게 예정에 없던 산책은 더 길어집니다.





결과적으로 이 날은 아침의 짧은 해운대 '감상'을 제외하면 생각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던 날이었습니다. 기대했던 달맞이 길은 실망스러웠고, 돌아오던 길에 발견한 철길로 내려가는 길은 잊을 수 없을 해프닝을 안겨줬죠. 그 길을 걷는 것조차 어디로 가는지, 언제쯤 도착할지 알 수 없었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 중 가장 많이 웃었던 시간도, 가장 즐거웠던 산책도 이 날 오후에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처음 걷는 길, 예상치 못한 해프닝에서 여행의 이유를 발견하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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