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혹자는 이 곳에서 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 노을을 기다려 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이는 본 적 없는 영화 제목을 말하며 저보다 더 신나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이 저를 이 곳까지 이끌었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죠. 첫번째는 실패였지만, 결국 다시 찾아 보란듯이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말로 듣던 것보다 더 멋진 노을이었습니다. 여행의 마지막으로 이보다 좋은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 딱 하루, 그것도 마지막 날에 "


창문이 없는 싸구려 호텔방은 여행자를 부지런하게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나갈 채비를 하며 공용 화장실로 가는 길, 복도 끝 환한 빛에 순간 걸음이 멈췄습니다. 벽에 붙여놓은 그림처럼 환하고 선명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여행의 마지막 날, 결국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화창한 하늘입니다. 날씨 하나만으로 신이 나서 씻는 둥 마는 둥 서둘렀습니다. 그렇게 대만 여행 마지막 하루가 시작 됐고, 큰 고민 없이 저는 마지막 하루를 이 곳에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단수이 워런마터우(淡水 漁人碼頭)는 타이베이 MRT 빨간색 '단수이 선'의 종착역입니다. 타이베이 시내에서 약 40분을 달려 종착역에 도착하면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그만큼 더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제법 먼 관광지입니다. 해안가에 위치한 유원지로 다른 곳보다 관광 시설이 잘 마련돼 있어 여성 여행객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네요.


첫 날, 단수이를 찾았을 때는,

단수이가 그렇게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본격적인 여행 첫 날 오후에 긴 MRT 여행을 했지만 아쉽게도 비가 무척 많이 왔고, 안개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먼 길 온 게 아쉬워서 지하철역 입구의 바닷가 산책길부터 훙마오청(红毛城)까지 빗 속 산책을 했지만 차마 종착지 워런 마터우까지 갈 용기는 나지 않더군요. 그래서 그냥 발길을 돌린 아쉬운 기억, 그것이 단 하루 화창한 날씨가 펼쳐진 그 여행의 마지막 날 저를 망설임 없이 다시 이 곳에 오게 만들었습니다.



MRT 빨간색을 타고 끝까지 가면 단수이 역, 그리고 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워런마터우(漁人碼頭, 어인마두)까지 갈 수 있습니다. 워런마터우까지 가는 버스가 몇 개 있는데, 관광객 줄이 긴 곳으로 가면 틀릴 일이 없습니다. 버스 머리에 친절하게 안내가 되어 있기도 하고요. 이 날은 사람이 무척 많아 버스가 입구까지 가득 찼습니다.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일주일간 이 날을 기다렸겠죠.



바닷가 유원지 풍경


종착역이었나 바로 그 전 역이었나, 워런 마터우에 도착하니 버스에 남은 사람을 이 동네 사는 할머니와 학생 두 명 정도였으니 안내 방송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류장 뒷편에 펼쳐진 풍경은 달려오는 동안 버스 창 밖으로 보였던 시골 마을과 사뭇 다른, 잘 가꾼 바닷가 리조트를 연상 시킵니다. 부둣가엔 어선이 가득하지만 그동안 보아 온 바닷가 마을의 그것보다 너무나도 깨끗해 오히려 이질감이 생겼습니다. 화창한 날씨가 모든 것을 반짝반짝 빛나 보이게 했을 수도 있겠죠. 선착장 뒤로 보이는 거대한 다리 그리고 그 위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풍경이 한적한 유원지에 온 기분을 들게 했습니다.



숙박 시설로 보이는 건물과 보기 좋게 지어진 상점들, 공연용으로 제격인 무대와 객석까지. 한 시간 넘게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온 타이베이 외곽 바닷가 마을이지만 단수이 워런마터우는 시내 중심가 못지 않게 세련된 인상의 유원지였습니다. 언제부터 이런 화려한 외모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한적하고 낭만적인 하루를 기대했던 제게는 다소 김빠지는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쉬기 좋고 놀기 편한 이 곳에 이미 휴일을 보내려 모인 사람들이 가득했거든요. 가족 단위로 나들이를 나온 대만 사람들이 많았지만, 익숙한 말을 하는 한국인 관광객도 다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대만에는 한국 관광객이 많습니다.


화창한 휴일의 워런마터우


일주일, 대만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화창한 하늘입니다. 아마 이 곳 사람들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 이런 오후를 기다렸는지도 모르죠. 모르긴 몰라도 이 날 다른 때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화창한 휴일 오후를 보내려 단수이 워런 마터우를 찾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랑의 다리부터 해안가를 따라 쭉 이어진 산책로, 그리고 선착장 주변 카페와 광장에 빈 틈이 쉬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까요. 다른 때 같았으면 엄청난 인파에 가슴이 답답해질 만도 했지만 대만에서 처음 만난 맑은 날씨가 저를 한없이 느긋하고 너그럽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 틈 사이로 바닷가를 걷는 것 만으로 기분이 조금씩 좋아진 오후였어요.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이 넓은 바닷가를 구석구석 걸었습니다. 사람이 많아 오히려 복작복작 더 신이 난 시간이었습니다.




사랑의 다리로 불리는 워런 마터우의 다리는 별 다른 이유없이 자꾸 건너고 싶은 매력이 있습니다. 끝자락에 서 있는 커다란 'LOVE' 조형물은 다리를 배경으로 연인이며 가족들이 함께 사진찍기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다리를 지나 해안가를 쭉 따라 걸으면 영화 속 장면에 나온 등대까지 닿게 되는데, 이 곳엔 길고 험한 해변길을 거침없이 걸어온 젊은 여행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어느 용감한 청년이 빨간 등대에 오르고, 주변에 모인 청춘들이 박수를 치며 격려하는 모습은 사랑의 다리에서 보았던 것과 사뭇 다른 풍경입니다. 그 외에도 이렇게 좋은 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생길 수 있는 다양한 장면들이 이 날 오후를 채웠습니다. 혼자 온 제가 외로움을 느낄 수 없이 풍성하게.



일주일을 기다린 단 한번의 노을


오후 다섯 시가 지나자 주변이 조금씩 어두워집니다. 도착하자마자 쉬지 않고 이 마을을 구석구석 걸었던 저도 해안가 나무 산책길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저처럼 노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빈 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중 몇몇은 맥주와 주전부리를 챙겨 왔는데, 그 순간엔 그게 딘 타이 펑의 샤오롱바오보다 더 간절하고 부럽더군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약속한 듯 바닷가에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아주 긴 시간동안 서서히, 많은 이야기와 생각들을 하며.



해가 떨어지며 이 여행 마지막 밤이 솟아 오릅니다. 내일 아침 아홉시 비행기를 타야 하니 이것이 대만에서 맞는 마지막 노을입니다. 다행히 단 한번이지만 화창한 하늘과 붉은 노을을 다름 아닌 이 곳에서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어서 지난 일주일의 여행을 돌아보고, 돌아가면 지인과 가족들에게 이야기 해 줄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일주일간 쉬지 않고 걸었던 여행을 마무리하기엔 더 없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구름은 빠르게 지났고 하늘은 천천히 색을 바꿨습니다. 모르는 새 주변은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이 시간만큼은 사진보단 눈과 가슴으로 여행 마지막 장면을 담고 싶어 카메라를 세워두었습니다. 몇 초에 한 장씩, 그렇게 내 대신 남겨달라고.





< 단수이 워런마터우의 노을 >




노을이, 구름이 그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나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 났습니다. 한바탕 잘 놀았다며 속은 후련했는데, 차마 발길을 돌리기가 쉽지 않더군요.


'더도 말고 하루만 더 있고 싶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노을과 함께, 일주일간의 타이베이 여행이 끝났습니다. 멋진 라스트 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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