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훌쩍, 하지만 너무 멀리 떠나고 싶지 않을 때

나를 위로하고 싶을 때 생각나는 도시.

- 공항 밤샘은 힘들어 -


 지난 여름 후쿠오카 여행은 '인생이 쓸 때, 모스크바' 원고에 한창 시달리던 중에 다녀왔습니다. 난생 첫 공항 밤샘에 잠시 눈 붙일 새도 없이 도착해버렸던 가까운(?) 도시. 특유의 분위기와 멋진 음식들에 반했고, 언제든 다시 올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기분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탈고하던 날, 다시 이 도시를 떠올렸고, 삼개월여 만에 두 번째 여행을 했습니다.


 이제 제주도보다 가깝게 느껴지는 일본 후쿠오카. 얼마 전 세 번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제 교통편을 체크할 필요도 없고, 가고싶은 곳을 검색하지도 않게 된 곳이 됐지만 역시나 아직 먹을 음식들이 많기에 언제든 즐겁습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은 체코 프라하와 함께 오랫동안 꿈꿨던 오키나와도 함께 다녀와서 더 기억에 남습니다. 5박 6일, 일본 여행으로는 다소 긴 기간이었지만 다녀오니 그 두 배쯤 기간을 잡았어도 지루하지 않았겠다 싶습니다. 영화 속 장면을 보며 꿈꿨던 오키나와 해변을 보던 순간, 이 섬에서 열흘쯤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후쿠오카,

이젠 너무 편한 친구같은 도시.

- 야타이가 있는 후쿠오카의 밤 -


 후쿠오카를 떠올리면 거리 곳곳에 야타이(포장마차) 불빛이 늘어선 밤풍경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텐진부터 하카타까지 크고 작은 골목길들이 그럭저럭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오죽하면 이번엔 떠나는 전날에도 하나도 설레지 않았습니다. 일 년만에 벌써 세 번째 여행이니 그럴만도 하죠. 일본에 사는 친한 친구같은 느낌입니다, 후쿠오카는. 그것은 자주 찾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일본답지 않게 후덕한 이곳 사람들의 인심과 적당히 낯설고 적당히 익숙한 것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 밤샘 후유증을 달랜 휴식 카페 -


 같은 도시를 다시 여행 한다는 것이 때때로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이 시간동안 다른 미지의 땅을 여행할 기회를 놓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하지만 막상 도시와 다시 만나면, 재회가 아니면 느낄 수 없는 것들이 같은 배경으로 또 다른 이야기를 선사합니다. 이제 첫 번째 여행처럼 시간을 쪼개 다자이후나 야나가와를 찾아가지 않고, 남는 시간에는 지하 상가에 있는 카페에 앉아 여유를 부릴 정도로 헤픈 여행자가 됐지만 그래서 오히려 점점 더 이 곳이 좋아집니다. 공항 밤샘의 여파로 기운이 쭉쭉 빠지던 여행 첫날, 다이묘 거리 외곽의 카페에서 가만히 앉아 휴식을 즐기니 이곳이 일본이라는 것조차 잊게 되더군요. 후쿠오카는 어느새 일상과 여행 사이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 후쿠오카의 밤 -


 5박 6일을 후쿠오카, 오키나와로 쪼개 쓰다보니 후쿠오카에서는 삼일밖에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지난 여행에서 그리웠던 곳들을 다시 찾기에도 부족했던 시간, 그래서 마지막 밤은 일부러 호텔까지 걸어갔는데, 동네를 걷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하지만 너무 낯설지 않은 배경이 필요할 때 찾을 수 있는 곳이 생겨서 기뻤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후쿠오카는 이런저런 이유로 자주 찾게될 것 같습니다. 음식, 휴식 아니면 쇼핑을 핑계로 말이죠.



먹으러 떠나기 가장 좋은 도시

- 후쿠오카의 산더미 회덮밥 -


 지난 두 번의 여행에서 그야말로 산해진미를 즐겼지만, 올 때마다 이곳은 새로운 먹거리로 저를 감동시킵니다. 하루에 세 끼밖에 먹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운 곳은 일본과 이탈리아뿐일 정도로 두 나라의 음식을 좋아하는데, 이번에도 후쿠오카에서 멋진 음식들을 잔뜩 즐기고 왔습니다. 아마 이번 후쿠오카 이야기도 음식이 주인공이 될 것 같습니다. 


- 오키나와의 불타는 스시 -


 거기에 후쿠오카보다는 덜하지만 일본인 듯 일본같지 않은 매력으로 오감을 사로잡은 오키나와의 음식들까지 더해지니 처음엔 잘 쉬고 오자던 여행이 그야말로 제 모든 여행 중 가장 잘 먹은 여행이 되어버렸습니다. 덕분에 서울에 돌아온 후 늘어난 턱살과 뱃살을 빼기 위해 강제 다이어트 중이라죠. 그래도 여행 중 먹은 사진들을 보면, 한동안 음식에 욕심 내지 않아도 되겠다 싶습니다. 이번 음식 여행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


- 오키나와에서 이런 응원을 받을 줄이야 -



드디어 만나, 오키나와.

- 후쿠오카에서 오키나와로 -


 사실 후쿠오카에서의 시간은 이번 여행의 진짜 목적지인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그만큼 오키나와에 대한 기대가 컸거든요. 개인적으로 무척 가보고 싶었던 곳이고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후쿠오카에서 내내 목요일이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일본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아시아의 하와이라는 오키나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남겼습니다.



단 한 장면만으로도.

- 오키나와 미라부 해변 -


 영화 속 장면을 보며 동경했던 오키나와. 그 중에서도 소박한 모래 사장에 화려한 날씨가 아이러니하게 펼쳐진 해변 풍경이 이 섬을 꿈꾸게 했습니다. 막상 오키나와에 있는 동안 바다에 있었던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남쪽 바다 미라부 해변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믿을 수 없는 눈 앞의 풍경을 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기대했던 꼭 그만큼의 감격을 안겨준 미라부 해변의 풍경, 그 한 장면만으로도 그동안 오키나와를 동경하고, 이 여행을 기대했던 긴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첫 여행의 조바심

오키나와 슈리 성 -


 어느 도시든 첫 번째 여행은 욕심을 내게 됩니다. 오키나와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참 부지런히 움직였는데요, 그 중 하나가 오키나와의 옛 이름인 류큐 왕국의 성 '슈리 성'에서의 오후였습니다. 매우 뜨겁고 화창한 오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류큐 왕국의 흔적들은 그동안 보던 일본의 건축과도 다른 느낌이라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다음 여행에선 다시 찾지 않겠지만 한 번쯤 꼭 가볼만한 곳이었어요.

여유로운 섬의 일상

오키나와 국제거리 시장 -


오키나와 국제거리 -


 오키나와는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흔히 보이는 매우 혼잡한 관광지였지만, 나하 시의 대표적인 관광지구인 국제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 작은 골목길에 들어서면 제주도를 연상 시키는 여유로운 섬 생활들을 곁눈질이나마 즐길 수 있습니다. 시장의 풍경은 인심 좋은 우리네 장터 풍경과 다르지 않고, 낡은 지붕과 문짝의 상점들도 정겹습니다. 골목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는 몇 시간째 손님 없이 텅텅 비었지만, 바리스타는 그저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표정이고, 오후 한 시에 문을 여는 장난감 가게는 해가 지기 전에 문을 닫습니다. 밤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 삼삼오오 골목의 식당과 술집에 모여 나마 비루(생맥주)에 수다를 곁들입니다. 함께 있다보니 내일 모레 돌아가야 하는 저도 왠지 느긋해지더군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

- 우연히 발견한 공예점에서 -


 스물하고 네 걸음이면 끝까지 갈 수 있기에 24보 거리로 이름 붙여진 국제 거리 시장 골목의 초입에서 노란 조명의 수공예 상점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오키나와의 특색을 살린 기념품을 파는 곳이겠거니 했는데, 설명을 들으며 놓인 것들을 보니 기가 막힙니다. 다섯개의 네모와 네 개의 네모가 끝 없이 이어지는 바둑판 패턴은 인연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오키나와 사람들의 맘씨가 표현된 것이라고 합니다. 달걀 모양의 나무가 매달린 키링은 손때가 타 까맣게 변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라고 하네요. 오늘 날짜를 새겨 놓고 두고두고 보면서 말이죠.

- 이름과 날짜가 적힌 기념품 -


 그래서 저도 제 이름과 날짜가 적힌 키링을 챙겼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멋지게 나무를 늙게 할 것이라 기대하며, 그리고 다시 오키나와에 오는 날 반대쪽에 함께 온 이의 이름을 새기겠노라 다짐하면서 말이죠.



변덕스러운 섬날씨.

- 비가 그친 뒤 -


 돌아오는 날 아침은, 숙제를 잔뜩 밀린 여름 방학 마지막 날 아침처럼 마음이 급합니다. 떠나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아침부터 폭우가 내리면 대부분 그냥 체념하게 됩니다. 얄궂은 섬날씨는 이틀간 한여름처럼 뜨겁고 화창했지만, 마지막 날은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뭐, 덕분에 여느 여행보다 길었던 5박 6일을 일찍 돌아볼 수 있어 좋았지만, 역시나 다음 여행을 위한 이 섬의 속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라스트 씬이라면,

여행이 이제 그만 그쳐도 좋아.


 미라부 해변에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연히 이끌린 겨울 도시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여행이 막연히 꿈꾸던 체코 프라하를 지나 오랫동안 동경하던 오키나와에 닿아 마무리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마지막 장면이 이 정도라면 미련 없이 끝낼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오키나와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부터 편안함과 설렘으로 상반된 일본의 두 도시, 후쿠오카와 오키나와의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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