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예전엔 벚꽃 시즌이면 꼭 여의도를 갔는데 몇 해 전부터 공교롭게 4월에 일이 생기더니 어느새 벚꽃을 창 밖으로, 다른 이의 사진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당연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올해 역시 그럴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밀린 일을 겨우겨우, 데드라인에 맞춰 하나씩 해가고 있는 4월, 벚꽃은 스마트폰 #벚꽃스타그램에만 있고 멋진 노을은 지하철 창에나 그려진 풍경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저녁을 든든히 먹고 일찍 누워 쉬던 중 모처럼 저녁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느끼게 됐고, 그래도 벚꽃 한 번은 보아야겠다 싶어서 카메라를 매고 집 앞으로 나섰습니다. 운 좋게도 집 앞 우이천에는 꽤나 멋진 벚꽃길이 봄마다 펼쳐지거든요.



평소에는 별 생각없이 주로 어머니 심부름이나 외출하는 길에 '빨리 지나쳐야 하는 길'이었던 우이천 옆 길이 이때는 뭇 사람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이 날은 봄맞이 창 2동 축제를 앞두고 연등이며 현수막까지 단장이 잔뜩 되어 있었죠.

저는 벚꽃은 가까이에서 한송이씩 감상하는 것보다 몇발짝 떨어져 흐드러진 풍경을 보는 것이 더 좋더군요. 그래서 일부러 횡단보도를 건너 감상합니다. 이 때 봄바람이라도 불어 한바탕 꽃잎이 흩날리면 가히 '오늘 최고의 행운'으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벚꽃으로 유명한 국내/외 유명 관광지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만, 저녁까지 먹고 하루가 다 끝난 것 같은 늦은 시각에 혼자서, 특별히 차려 입지 않아도 벚꽃을 즐길 수 있는 길이 집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밤의 벚꽃은 화창한 낮에 보았을 때처럼 순결한 색은 아니지만 흐드러진 꽃잎이 인간이 만든 조명을 흐뜨리면 그것도 그럴듯한 풍경입니다. 아직은 쌀쌀한 봄 밤공기 덕분에 지난 겨울과 새 봄 사이 어딘가에 서있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도 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며 사실 벚꽃에 대한 관심이 해마다 뚝뚝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게는 다시는 이만큼 찍을 수 없을 것 같은 벚꽃 사진도 이미 있고 전국의 벚꽃 명소는 해마다 늘어나는 인파에 셀카봉까지 더해져 걷고싶지 않은 곳이 되었으니까요. 이렇게 '봄이 왔구나'라고 확인하는 용도로 충분해진 것이 슬프기도 하지만 올 봄엔 그보다 좋은 소식이 더 많을 것이라 기대해 봅니다. 벚꽃 따위야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대체 언제적 둘리야?" 하며 향하는 내 걸음



사실 카메라까지 들고 나온 이유는 집에 들어오는 길에 이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리의 배경으로 유명한(?) 쌍문동이 얼마 전부터 둘리 뮤지엄과 함께 다양한 둘리 관련 마케팅을 하고 있는데, 올해는 처음으로 우이천에 둘리 모양 등을 전시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둘리가 저랑 동갑이라고 하니 사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둘리가 뭐야?'라고 할 정도로 유물이 되었는데요. 속으로는 '대체 언제적 둘리야' 라고 투덜대며 어느새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저도 어쩔수 없는 구세대인가 봅니다. 사실 이 둘리 마케팅이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동안 서울의 연등 행사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등이라 관심이 가긴 했습니다.-




마침 둘리 뮤지엄 광고가 붙은 버스까지 한 대 지나가니 순간 이곳이 둘리 축제 현장이 되었습니다. 멀지 않으니 언제 한 번 둘리 뮤지엄에 들러 보겠노라는 생각을 하면서 둘리 축제 현장을 떠납니다.





다시 봄 밤의 벚꽃 낭만에 돌아와 사람들이 봄꽃을 즐기는 다양한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이래나 저래나 사람들은 계속 사랑을 하고 혹은 새로운 사랑에 빠지며, 새 생명이 탄생하니 봄꽃 축제에 시들해질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 같습니다. 엄마 등살에 떠밀려 벚꽃과 함께 사진을 찍는 아이를 보니 문득 제 첫 벚꽃 축제는 어땠을지 궁금해 집니다. 아쉽게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저는 그리고 당신은 벚꽃을 좋아하게 됐을까요?



그렇게 혼자만의 봄 벚꽃 축제는 삼십여분만에 끝났습니다. 나무 가득 흐드러진 벚꽃잎보다 땅에 떨어진 낙화에 더 눈이 가는 제 모습이 오히려 더 좋은 구경거리였던 것 같습니다.

쫓겨난 겨울 코트와 카페 안 온도로 이미 느꼈지만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벚꽃잎을 통해 그리고 비가 오면 꽃 떨어지겠다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더욱 실감하게 된 2016년 봄, 어느 해보다 감상 없이 시작했지만 그만큼 좋은, 멋진 일들이 빈 틈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새 봄에도 복 많이 받으세요,

더 늦기 전에 혼자라도 봄꽃놀이를 즐겨 보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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