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쓴 편지

재미있게도 해운대에 대한 제 기억은 차가운 제 콧망울입니다. 초겨울 혹은 늦겨울의 차가워진 또는 아직 차가운 공기가 늘 배경이었죠.


자의든 타의든 그 곳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두툼한 외투가 함께였고 그래서 가벼움 보다는 느긋함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바닷가는 유독 천천히 걸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붙인 이 끝과 저 끝을 몇 번이고 왕복하며 걷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도 혼자 그 산책을 즐길 수 있어 무척 좋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늘 차가운 계절이다 보니 이 유명한 해운대 바닷물에 발 한번 담근 적이 없습니다. 언제부턴가는 아예 포기하고 그저 모래나 잘 막아주는 단단한 짜임의 운동화나 부츠를 챙겨 신었던 기억입니다. 그래도 이 곳은 '바다'라는 것만으로 그저 좋았고 고개를 돌리면 마음을 짓누르는 듯한 고층 건물의 번화가와 대비되어 한층 더 여유로운 느낌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걸으면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습니다. 꿈에서 깰까봐서요.




걷다보면 알게됩니다, 그다지 답답하지 않았던 내 생활이 실은 이 정도 자투리 여유라도 꼭 필요할 정도로 빡빡했었고 오늘까지 끝내야 한다며 나를 괴롭혔던 일들도 생각해보니 까짓것 하루 잠을 포기하고 이 바다에 투자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도요. 그 날 해운대 바다는 마침 무척 화창했었고, 공교롭게도 매번 두툼한 옷만 챙겨오느라 어깨가 무거웠던 저를 위로하듯 햇살마저 참 따뜻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차가워진 공기는 어찌할 수 없었던지 결국 재킷 단추를 서너 개 채워야 했지만요.



'나와 당신의 거리'


당신은 말 그대로 당신이기도 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 아닌 것들이 되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그것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한 '요령'이 되었습니다. 파도가 소리만으로 느껴지는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고 해운대를 걷다 보면 저보다 용감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뒤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저를 함께 용기나게 하거나 뒤뚱뒤뚱 재미난 걸음을 하게 만듭니다.


이 날 해운대에선 그들의 용감한 뒷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혼자 달리는 걸음은 가장 힘 있는 걸음입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있는 힘만큼 모래를 차고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 힘에 반한 저같은 사람이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도 하고, 누군가가 같은 방향, 속도로 따르기도 합니다.







둘의 뒷모습은 가장 풍부한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함께 떠나 온 친구들의 뒷모습에선 반가움, 즐거움 등의 뜨거운 감정들이 느껴지고 연인들의 실루엣은 그 사이에 아무리 먼 거리와 많은 방해물이 있어도 하나로 보입니다. 그 사이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실은 미세한 떨림 때문인지 선명해 보이진 않습니다. 가만히 앉은 두 친구의 뒷모습에선 많은 대화가 들릴까요 혹은 긴 정적이 느껴질까요? 어찌됐건 참 '잔잔'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보는 저 까지도요.





부부와 두 아이, 이 가족의 뒷모습에선 아마 단 하나의 감정만이 느껴지실 거에요.






어쩐지 말풍선이 보이는 듯한 친구의 나란히 앉은 뒷모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긴 호흡을 발견하기도 하죠.

그들 사이의 거리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주보지 않는다고 해서 타인인 것이 아니고 혹여 서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고 해도 그저 그들 이야기의 연장이라 느껴집니다. 뒷모습에는 얼굴보다 더 진실한 표정이 있다는 말을 시간이 가며, 시선이 쌓이며 저는 점점 더 믿게 됩니다.





저는 그 짧은 오후, 일년에 한 번 겨우 찾는 해운대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을 기억하기는 커녕 한번 본 적도 없지만 분명히 그들에게 반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본 모습이 그들의 진실한 표정이라 믿습니다.



그날 저는 그들과 제법 먼 거리에 있었지만, 누군가 보기에 그들과 하나로 묶여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그들을 바라보았을 때 느꼈던 것처럼 말이죠. 그 날 얻었던 뜻밖의 여유를 오래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사진들 중 한 장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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